1861년
‘땀의 증거자’로 불리던 조선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가 과로와 급성전염병인 장티푸스에 감염 1861년 6월15일 경상도 문경에서 40년의 생을 마감했다.
1849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최 신부는 12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이 땅의 천주교 신앙의 주추를 놓은 땀의 목자였다. 그는 제4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주교에게 그간의 사목보고를 하기 위해 상경하던 길이었다.
1821년 충청도 홍주 다락골에서 출생한 최양업 신부는 증조부 최한일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이래 대대로 신앙을 이어왔다.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에서 신학수업을 받은 후 1849년 상해에서 중국 강남교구장이던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28세의 나이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서품 후 그해(1849년) 12월초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통해 입국했다.
1850년부터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시작한 최 신부는 바로 그해에 6개월 동안 5개 도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찾아 2401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1764명에게 성체를 영해주었으며 18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계속되는 박해를 피해 신자들은 깊은 산골에 숨어살았으므로 이들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 신부는 귀국해 한시도 쉴 사이 없이 이렇게 전국을 누비고 다니며 맹렬한 사목활동을 벌였다. 1년에 7000여리를 헤매고 다닐 정도의 고된 사목활동을 그는 1850년부터 1861년 6월까지 계속했다. 결국 최 신부는 지친 몸을 이끌고 사목방문을 강행하다 전염병까지 겹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최 신부의 헌신적인 노력과 굳은 신앙심 고통 중에 있던 가난한 교우들에게 베푼 사랑을 기억하는 많은 교우들은 훌륭한 목자를 잃어 슬픔에 겨워하면서도 천주님 대전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기를 기도하고 있다.【이주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