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막고 외세를 이용해 신앙을 지키려 했던 황사영(알
렉시오)이 1801년 9월29일(음) 충청도 배론에서 체포됐다.
황씨는 반국가적인 내용의 ‘백서’(비단에 쓴 글)를 써서 천주교도 황심(黃
心)을 통해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하려다 3일전 황심이 체포됨으로써 은신
처가 발각됐다.
황씨가 쓴 백서는 △서양국가들의 재정원조 △북경 교회와의 연락방안 △교
황과 청나라 황제가 조선에 압력을 가해 천주교를 받아들이도록 하자는 제안
△조선이 청나라의 한 지역이 되는 ‘내복·감호책(內服·監護策)’△서양선박
영입방안 등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천에 작은 붓글씨로 씌어진 이 백서에는
이밖에도 신유박해로 죽어간 신자들과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죽음 신유박해의
진행과정 박해로 인한 교회의 어려운 상황 등이 자세히 적혀있다.
황씨는 국문 중에 “외국의 힘을 이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부당하고 참혹한
박해를 멈추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며 “이런 만행을 일삼는 국가체제
에 승복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백서를 작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포도대장 이한풍은 “백서를 처음보는 순간 이것은
‘흉서’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내용이 너무 놀라워 잠시 두려움에 빠지
기도 했다”고 수사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한편 조정대신과 유학자들은 백서의 내용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백서를
역모에 대한 확실한 물적증거로 삼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가세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박해가 어느 정도 진정국면에 들어서는 가운데 발생한
황씨의 ‘백서사건’으로 인해 또 한차례 천주교인들에 대한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이 예상된다.
■ 황사영 그는 누구인가
자는 덕소 본관은 창원 다른 이름은 황시복이다. 1775년 서울에서 출생한 황
씨는 1790년 16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해 진사가 되었다. 이에 정조
는 황사영을 불러 치하한 후 손목을 잡으며 “네가 20세가 되거든 나를 만나러
오너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고 말해 그의 출세는 이
미 보장된 것과 다름없었다.
그후 황씨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과 1790년 결혼했으며 같은
해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살았던 신유박해 때 죽음을
당한 정약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교 후 전시(殿試)에 나아갔지만 매번 백지를 제출했다. 이에 정조는 대신
들을 통해 충분히 공부해 응시하도록 하였고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몹시
슬퍼하며 연민의 정을 나타냈다고 한다.【이주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