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10월28일 교황 비오 12세의 후임으로 이탈리아 가난한 농가 출신의
론칼리 추기경이 77세의 나이에 교황직에 올랐다. 그가 교황 요한 23세이다. 요
한 23세는 세계 가톨릭 교회를 이끌어 가기에는 너무나 노쇠한 듯해 사람들은
그를 과도기의 교황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선임자들과는 다른 면모
를 보였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이후 역대 교황들이 한번도 바티
칸을 떠난 적이 없었지만 요한 23세는 바티칸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로마의
교도소를 비롯해 고아원과 병원을 방문했으며 로마 근교의 본당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1959년 1월25일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주간을 마치면서 요한 23세는
주위가 깜짝 놀랄 발언을 했다. 교황은 이날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기도주간 폐
막미사를 봉헌한 후 베네딕도회의 성 바오로 수도원을 방문 그곳에 있던 17명
의 추기경에게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금세기 가톨릭 교회의
최대 사건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시작됐다.
소집배경과 준비과정
교황의 공의회 소집 발언은 사전에 특별히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교황 자신
이 나중에 고백했듯이 그는 이 구상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이를 초
자연적인 영감이라고 판단해 발언했다는 것이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크게 세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로마교구 시노드를 소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
회법전을 시대에 맞게 개정하는 일이었으며 마지막이 세계공의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공의회로 인해 요한 23세는 역사에 기억되는
교황이 됐다.
교황의 공의회 소집 공표는 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공의
회가 소집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
전의 공의회들은 대부분이 교회가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해야 할 필요가 생겼을
때에 소집됐으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교회는 외형적으로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신앙교리를 특별히 명확히 해야 할 계기도 교회에 위협을 줄 만한 새
로운 이단도 없었다.
요한 23세는 공의회 소집 목표를 크게 두 가지로 제시했다. 급변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교회의 ‘쇄신 또는 적응(Aggior\ namento)’이 그 하나였고
갈라져 있는 ‘그리스도 교회들의 일치’가 다른 하나였다. 세상이 급변하고 사
람들의 삶의 양식과 사고방식이 변하고 있지만 교회는 다양한 삶의 영역에 별
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교황은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 23세는 1959년 5월17일 주교들과 신학자들로 공의회 준비위원회를 구
성하고 공의회에서 다루게 될 주제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 정리토록 했다. 이
를 바탕으로 1960년 6월5일 공의회 준비를 위한 중앙위원회 산하 12개의 위원
회와 사무국을 두었다. 12개의 위원회 대부분 교황청 각 성(省)의 관계자들이
참여했으나 평신도사도직위원회와 그리스도교 일치촉진위원회 등은 새롭게 신
설된 위원회였다.
이 중앙위원회에서는 모두 67개의 토론주제를 마련했고 교황은 1962년 7월
회칙 ‘회개하기 위하여’를 반포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회개와 쇄신을 촉
구했다.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기본정신이 됐다. 이어 교황은 그해 8월
자 교서 ‘다가오는 공의회’를 발표 공의회 진행에 관한 지침을 제시했다.
진행과정
1962년 10월11일 교황 요한 23세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제2차 바티
칸 공의회의 개회를 장엄하게 선포했다. 개회식에는 공의회에 초대된 2908명의
교부(敎父)중 2540명이 참가했으며 동방교회와 개신교 17개 교파에서도 35명의
대표가 참관인으로 초대받아 참석했다. 교황은 개회연설에서 지나치게 보수적인
입장과 급진적인 입장의 양극단을 경계하면서 가톨릭 신자 사이에서의 일치 가
톨릭과 타그리스도교 사이의 일치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타종교간의 대화와 일
치 등 세 가지 차원에서의 일치를 강조했다.
제1회기에서는 각 위원회의 위원을 선출한 후 ‘전례’ ‘계시의 원천’
‘매스 미디어’ ‘동방교회’에 관한 의안을 다루었지만 뚜렷한 성과없이 끝
나고 말았다. 그리고 1963년 6월3일 요한 23세의 죽음으로 공의회는 자동적으로
휴회됐다.
그러나 요한 23세의 후임으로 교황직에 오른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는
공의회의 속개를 선언하고 1963년 9월29일에 제2회기를 소집했다. 12월4일까지
계속된 제2회기에서는 ‘전례헌장’과 ‘매스미디어에 관한 교령’을 통과시켰
다. 이어 1964년 9월1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새로운 전례에 따라 제3회기 개막
미사를 봉헌했고 그해 11월21일 폐막된 제3회기에서는 ‘일치운동에 관한 교
령’ ‘교회헌장’ ‘동방교회에 관한 교령’ 등 3개 문헌이 채택됐다. 마지막
제4회기는 1965년 9월14일부터 12월7일까지 이어졌다. 여기에서는 ‘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령’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 ‘사제양성
에 관한 교령’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관한 선
언’ ‘계시헌장’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선언’ ‘사제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사목헌
장’이 반포됐다. 공의회는 이로써 4개 헌장과 9개 교령 3개 선언 등 모두 16
개 문헌을 채택하고 12월8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폐막됐다.
성과와 의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공의회는 전반적으로
교회 안팎에서 열렬한 지지와 환영을 받았지만 교회내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가
톨릭 신앙을 오히려 혼란에 빠뜨리게 한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실제로 공의회
직후에는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대립으로 교회가 분열되는 모습을 드
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공의회가 이룩한 개방과 대화쇄신과 적응의 정신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교회의 삶에 자극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계기가 됐
다. 전례의 쇄신으로 신자들은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미사전례에 더욱 능동적으
로 참여하게 됐고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과 타종교와의 대화와 협력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교회헌장은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이해하게 해주었
고 평신도를 교회의 능동적인 주체로 봄으로써 평신도의 신원과 평신도 사도직
에 대한 이해를 한 차원 더 높여 주었다. 또 교황과 주교들의 관계도 주교단의
‘단체성’이라는 차원에서 새롭게 제시했다. 특히 세상에 대한 교회의 개방과
대화를 강조함으로써 교회가 세상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후 400
여년 만에 일대 쇄신을 이룩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새 시대를 열게 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쇄신노력은 바오로 6세와 그 후임인 현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78∼)에게서도 계속됐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새로운 교회법전을 반포
했으며 1992년에는 새로운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펴냈다. 또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도 꾸준히 전개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