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희년을 맞이하며 200년 한국천주교회사를 민족사적 관점에서 접근 비판적인 안목으로 성찰하고 반성하는 뜻깊은 토론의 장이 마련됐다.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사목연구소(소장 김종수 신부)가 6일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대강당에서 개최한 ‘한국천주교회사에 관한 대희년 심포지엄’에서 참석자들은 교회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교회가 민족사에 끼친 과오를 시대별로 진단하고 진지한 반성을 촉구했다.
참석자들은 교회와 사회와의 충돌은 대부분 교회가 당시의 민족사적 요구나 보편적인 가치를 외면한 채 맹목적인 신앙의 논리만을 고집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보편적인 가치의 기준에서 볼 때 그 요구가 타당하다면 교회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며 이를 외면할 경우 그 사회로부터 배척당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순기능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켰던 기존의 교회사 연구와 시각을 달리해 교회가 우리 역사에서 걸림돌이 되었던 사건들에 대해 구체적인 자료제시와 함께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다음은 발표문 요약이다.
▲서양선박 요청 사건과 교회(여진천 신부·원주교구 교회사연구소)〓18세기말 초기 천주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선박 요청이라는 방안을 강구해 냈다.
당시 천주교인들은 선교사를 태우고 오는 선박을 막연히 교황이 다스리는 서양의 어느 나라에서 오는 것으로 인식하고 서양의 선박과 선교사가 오면 천주교에 대한 금령이 풀려 천주교를 널리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이에 1796년 교회 지도자들과 주문모 신부는 서양선박을 요청하는 서한을 북경 주교에게 보냈고 1801년 황사영은 백서에서 천주교 포교의 공인을 위해 수백척의 서양선박과 5 6만명의 병력이 와서 무력시위를 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같은 서한과 백서는 신유박해를 확대하는 결과만을 낳았다. 순수 종교적인 목적이라는 황사영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반민족적인 것인 중대한 협박이었다. 정부는 이때부터 신자들을 조선의 정체를 부정하고 나라를 뒤집으려는 반역집단으로 확고히 인식하게 되었다.
▲한국 전통문화와 교회의 충돌(최기복 신부·인천가톨릭대)〓16세기 중국에 전파된 천주교는 예수회의 현지 적응주의적 선교정책과 동양문화를 존중하는 교황청의 관용적인 태도에 힘입어 선교에 활기를 띤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교황청은 비그리스도교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과 함께 정복주의적 선교정책을 펼치게 되는데 이러한 정책은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제사금지라는 조처로 구체화됐다. 미신적인 의식이라는 이유를 내세운 제사금지 조처는 즉각 중국 정부와 국민들로부터 큰 반발을 샀고 천주교 박해라는 불행을 낳았다.
이같은 상황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황청의 지시에 따를 수 밖에 없었던 조선의 신자들 가운데 윤지충은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버렸다. 이러한 행동은 전통사상과 윤리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패륜으로 인식되었고 천주교는 패륜의 사교로 낙인찍혀 결국 신유박해로 이어졌다.
이후 20세기에 이르러 교황청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등을 통해 토착화가 교회의 근본 자세임을 천명하며 동양의 전통 제례를 공인하게 된다.
교회의 성장과 발전이란 선교지 문화와의 교섭을 통한 복음의 토착화이며 동시에 토착문화의 복음화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전통적인 토착문화에 대해 가르치고 변화시키려는 시도보다는 이를 제대로 파악하고 배워서 그리스도교를 풍요롭게 하려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조상제사를 둘러싸고 전개된 피의 교회사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배울 수 있다.
▲개항기 교회의 선교정책과 사회와의 충돌(장동하 신부·가톨릭대)〓개항기 한국 천주교회는 프랑스 교회의 재정적인 지원과 선교사들의 전적인 지도와 보호 속에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와 주한프랑스공사관의 일방적인 신자 보호·지원정책은 주민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특히 선교사들이 민족 고유의 정서와 문화 법 풍습 등을 무시하고 야만시함에 따라 유교적 전통을 고수하는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의 횡포를 걱정하고 있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는 그리스도교를 기존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외세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선교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주시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선교활동이 서구 자본주의 세력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국적으로 천주교 입교운동이 확산되었던 반면 교회의 선교활동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거세게 나타났다. 반교회주의로까지 확대된 이러한 움직임은 전통사회와 전면 충돌의 양상을 띠는 1899년 강경포 교안 1901년 제주도 이재수의 난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결론적으로 개항기 교회사는 초기교회와 박해시대를 지나오면서 형성된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신앙정신이 사라지고 신자와 비신자들 사이에 경제·사회적 이해득실에 따른 분쟁과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증대한 갈등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민족운동과 교회(윤선자·전남대)〓구한말 일제 식민지 시기 민족운동에 대한 한국천주교회의 자세는 대체로 소극적이었다. 일제가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추진한 정치·종교 분리정책에 대해 교회는 선교에 대한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적극 호응하고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는 당시 교회의 통치권이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있었고 이들은 민족의식의 형성보다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가 최대의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강약의 차이가 있었을지언정 상황이 바뀌어도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의거에서 살필 수 있듯이 한국인 신자들은 민족의 난국에서 한국인으로서 의무를 수행하고자 했다. 비록 숫자가 많지 않고 교회의 공식입장과는 다르더라도 이들의 민족운동은 훨씬 적극적인 입장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민족운동에 대한 교회의 소극적인 태도는 신자증가율의 감소로 나타났다. 이는 민족문제에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교회를 보호하고 성장시키려 했던 교회 통치권자의 결정과 태도를 반성하게 한다. 보편적인 선의 기준에 비추어 그 가치와 요구가 합당하다면 교회는 이를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타당성이 입증되는 민족의 요구를 외면할 경우 그것은 곧 교회의 소멸로 치닫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정권과 교회(강인철 교수·한신대)〓일제시대 한국천주교회의 성격은 신사참배와 대동아전쟁에 대한 교회의 대응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조선총독부는 한일합방 이래 일관되게 신사참배는 비종교적 행위로서 선조들에게
존경심을 표시하는 국가적 의례일 뿐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에 반해 교회는 처음에는 금지하다가 허용론과 금지론이 맞서는 혼란의 시기를 거쳐 1937년부터는 참배를 허용하게 된다. 교회가 신사참배의 비종교성을 내세워 이를 허용한 것은 신학적인 탐구와 토론을 거쳐 나온 것이 아니었다. 1937년 이후 신사참배는 권장사항이 아닌 강제사항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