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전유럽대륙으로 확산되면서 경
제·정치·사회 구조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에는
이른바 ‘부르주아지’라는 자본가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노동자계급
이 형성됐다. 자본가계급은 혁신과 기술 자본을 바탕으로 온갖 수단을 다 동원
하여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려고 했고 반면 노동자계급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
임금으로 인해 갈수록 생활이 힘들어졌다. 이에 따라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의 대립이 심화됐고 그 과정에서 사유재산제도의 폐지와 무신론 계급투쟁을 통
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등을 내세우는 사회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새로운 변화는 교회에 큰 위협이었다. 특히 무신론과 사유재산제도의
폐지 폭력혁명 등은 교회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교
회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에서 자본가들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불의한 사회구조의 개선을 통
해 노동자의 권익향상을 구체적으로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특히 독일을 중심으
로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를 가톨릭 사회주의 또는 가톨릭 사회운동이라 한다.
독일 가톨릭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은 마인즈의 케틀러(1811∼77)주교였
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영국에서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1848년에 마
인즈 주교좌 성당에서 당시의 사회문제에 대해 거론하고 나섰다. 그는 부르주아
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적대관계에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갈수록 극심한 빈
곤을 겪고 있으며 사유재산권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해 있다고 당시의 사회를
진단한 후 특히 사유재산제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제시하고자 했다.
케틀러는 인간의 경제생활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중세기
대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모든 재화의 주인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다만 그 재화를 사용할 권리만 있을 뿐이라며 “재화의 사용에 있어서
는 하느님이 정해놓은 질서를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지상 재화를 모든 이가 필요한 만큼 사용하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재화는 공동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화를 각자가 소유하는 것은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보다 관리가 잘
되고 각자의 소유권을 인정할 때 혼동이 없이 질서가 유지되며 공동소유는 마
찰이나 충돌을 야기하지만 사유재산은 평화유지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
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
문제는 갈수록 열악해지는 노동계급의 처지를 어떻게 개선하느냐 하는 점이
었다. 이에 대해 케틀러는 처음에는 재화의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방안으로 외부적인 수단에 호소하기보다는 ‘마음의 변화’를 더 강조했
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마음의 변화만으로는 부족하고 “제도적인 혁신이 필요
하다”는 쪽으로 수정하여 생산조합 같은 노동자들의 결사체를 조직하는 일과
나아가 국가의 사회정책이 필요하다고까지 주장하고 나섰다.
케틀러의 뒤를 이어 모팡(1817∼90)은 노동자들의 결사체 조직과 함께 케틀
러보다 더욱 강력하게 국가의 개입을 요구했고 프란츠 히츠(1851∼1921)는
“우리의 삶 전체가 결사체로 조직돼야 하며 그렇게 될 때에 참다운 연대에 토
대를 둔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케틀러 주교의 제자인 포겔장(1818∼90)이 자신을 그리스
도교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당시의 자유 자본주의를 거세게 비판했다. 그는
사유재산을 사회가 책임질 수 있도록 법인조직을 만들 것을 주장하면서 국가의
개입을 강력히 요구했다.
스위스에서는 제네바의 메밀로 추기경의 주선으로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가톨릭 인사들이 ‘가톨릭 사회연구조합’을 만들어 1884년부터
해마다 집회를 가졌고 이탈리아에서는 주세페 토니올로 교수가 사회문제에 깊
은 관심을 보였다. 또 프랑스에서는 요한 라코르다(1802∼61) 빌레느브―바르게
몽(1784∼1850) 같은 인사들이 가톨릭 사회주의에 깊이 개입했다. 이들은 고전
적인 자유경제와 산업사회 체제를 비판하면서 노동계층의 권익을 위한 개혁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밖에도 1889년 런던의 부두 노동자 파업사태를 성공적으로 중재한 영국의
매닝 추기경과 미국에서 노동기사단의 결성을 지원한 기븐스 추기경 가톨릭 신
자들에게 노동조합 가입을 적극 권장한 호주 시드니의 모란 추기경 등도 19세
기 가톨릭 사회주의의 주요 인물들로 꼽을 수 있다.
교회 인사들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권익옹호를
위한 개입은 교회 안에서 점점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1891년 교황
레오 13세가 첫 사회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발표함으로써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가톨릭 교회의 ‘노동헌장’이라고도 부르는 이 회칙은 ‘새로
운 사태’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19세기 산업화 초기의 유럽 사회에서 노동
자들의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처지를 주시하면서 그 개선책들을 제시하고 있다.
회칙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의 해결책도 반대한다. 그리고 그 대안
으로서 국가의 적정한 개입과 입법 최저임금제와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역설
한다.
‘새로운 사태’는 당시의 노동계층이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그다지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 가톨릭 교회의 사회교리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교황 레오 13세는 교회로서 감당키 어려운 ‘새로
운 사태’에 직면하여 과거로 도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세상에 대해 현존하는 체제 곧 정치체제와 노동조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런 것들이 회칙 ‘새로운 사태’가
갖는 시대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이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