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9세(1846∼78)에 의해 1869∼70년에 바티칸에서 열린 공의회로 신
앙과 이성의 관계 그리고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에 대한 교리를 선포했다.
[배경]
트리엔트 공의회(1548∼63) 이후 교회는 300년 이상 공의회를 개최하지 않았
다. 그 사이에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사조가 팽배하면서 모든 것을 인
간 이성의 힘으로만 논증하려는 유리주의(唯理主義) 자연 이외의 초월적인 세
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연을 모든 존재와 가치의 기준이고 원리라는 입장을 내
세우는 자연주의(自然主義) 사회주의 범신론과 무신론 같은 사조들이 19세기
중반에는 교회 안에까지 침투해 위태롭게 하였다. 게다가 교황보다 공의회를 더
앞세우는 공의회 수위설과 지역교회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갈리아주의(제549호
참조) 등은 교권을 위태롭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오 9세는 1854년 공의회의 결정없이 교황좌에서 성모 마리
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신앙교리로 선포했고 10년 후인 1864년에는 가
톨릭 신앙에 해악을 끼치는 80가지의 항목을 지적한 유설표(謬說表)를 발표했
다. 이렇게 되자 프로테스탄트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회 안에서조차 교회의 보수
성과 진부함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고 교황은 공의회를 통해 이 문제들을 해결
하고 교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경과]
교황은 1868년 칙서를 발표해 1869년 12월8일에 공의회를 개회하기로 결정했
다. 그러나 공의회 준비 벽두부터 교황의 무류성을 둘러싸고 자유주의자들과 보
수주의자들간의 논쟁이 거세게 일어났고 공의회가 개막된 이후에도 찬반논쟁은
그치지 않았다. 700여명의 주교들이 참석했으나 논란이 계속 일어나자 교황의
무류성 문제를 뒤로하고 교회에 위협을 주던 세속주의 사조들의 문제부터 먼저
논의하기로 해 1870년 4월 교황령 ‘하느님의 아들’을 통해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를 정립했다.
공의회는 인간 이성의 힘만으로는 하느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주장을 단
죄하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의 존재를 더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하다
고 밝혀 이성과 신앙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또 범신론과 유리주
의 신앙제일주의의 오류들도 모두 배격했다.
핵심문제로 대두된 교황의 무류성에 관해서는 대다수의 주교들이 찬성했으
나 소수 주교들은 시기상으로 적절하지 않다며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다. 격렬한
토론 끝에 1870년 7월 표결을 통해 찬성 533표 반대 2표로 교황의 무류성과 수
위권 교리가 교황령 ‘영원하신 목자’로 반포됐다.
[결과] 독일 교회의 소수 주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공의회의 결정을 받
아들였고 그 결과 교황권은 더욱 강력해져 중앙집권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교황의 수위권이 부상하면서 교황과 주교들 간의 관계를 정립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공의회는 이 문제를 다루려고 했지만 유럽 사회의 혼란스러
운 상황으로 인해 취급하지 못한 채 폐막됐으며 이 문제는 1962년 제2차 바티
칸공의회에 와서야 다루어지게 된다.
한편 공의회는 교황의 무류성을 선포했지만 공의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황이 무류성을 행사한 것은 1950년 성모승천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한 것
단 한 차례뿐이었다. 교황의 무류성이 많은 문제를 낳을 것이라는 공의회 초기
의 우려와 반발이 사실상 기우였음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