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세계교회 역사에서 볼 때 한국 천주교회는 200년이 조금 넘는 역사
를 지닌 젊은 교회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100여년의 박해를 거쳐 수많은 순교
자를 낸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활력이 넘치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역사를 크게 4단계로 구분해 살펴본다.
지식인층 중심으로 출발
▲ 한국교회 창립과 박해시기〓초기 교회는 성직자없이 양반 지식인층 중심
으로 출발했다가 지하조직을 통해 서민층으로 뿌리내렸다.
북경을 통해 들여온 한역서학서(韓譯西學書)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다 하느님
을 알게된 조선시대 남인 소장파 지식인들은 복음 선교를 ‘천주의 명’으로
알고 주변의 지식층에게 직접 교리를 해설하고 한역교리서를 전달 복음을 전파
했다.
또 어려운 한역교리서를 쉬운 한문으로 요약 정리한 한문교리서와 한글만을
깨우친 서민층을 위한 한글교리서를 발간하고 글을 모르는 서민들을 위해서는
‘천주가사’ 노래로 교리를 전했다. 이렇게 볼 때 초기교회 선교활동은 문서선
교 구두선교 노래선교가 다 동원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활동은 교회 창설 이듬해인 1785년 을사추조적발(乙巳秋
曹摘發) 사건으로 박해의 수난 속에서 암암리에 전개돼야 하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천주교 신자’라고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위험 속에서 하느님을 믿다
가 발각돼 관헌에 끌려가 문초를 받으면서도 초기 신자들은 천주교 교리를 전
파했다. 당시 신분사회의 모순과 불의에 좌절한 서민층에게 천주교의 ‘내세구
원관’은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양반과 천민 남녀 빈부의 차별을 지양하고 하느님 앞에 모두가 한 형제·
자매라는 의식 또한 기존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이들을 하느님께 끌어당겼다.
조선에 첫 사제로 발을 들여놓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열심한 평신도 지도
자들을 중심으로 ‘명도회’라는 신심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점 조직을 통해 신
자들을 관리하고 전교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 뒤 입국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
회 선교사들은 박해를 피해 산골로 숨어들어 형성된 구교우촌 공소 공동체의
회장들을 임명 매년 이 회장들을 모아 가르치고 피정을 실시해 이들이 선교활
동의 중심에 서도록 했다.
박해의 위험 속에서도 이처럼 지하조직을 통해 복음 전파가 계속된 결과
1886년 한불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을 당시 이미 신자수가 1만4000여명에
달했다.
지역주민 계몽운동 벌여
▲ 구한말부터 일제시기〓숨어서 활동하던 시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선교
활동이 가능해졌지만 오랜 박해의 여파로 오히려 선교활동이 위축된 시기였다.
더욱이 종교의 자유를 제대로 누릴 사이도 없이 일본의 침략으로 교회활동
이 음양으로 제약을 받자 박해를 체험한 외국 선교사들은 교회를 보호하는 일
에 더 신경썼다. 교황청으로부터 한국선교를 위임받은 파리외방전교회는 정교분
리정책을 내세워 일제와의 마찰을 최대한 피했으며 민족 주권 수호와 같은 민
족공동체의 문제보다는 개인 신심 위주의 신앙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적극적 선교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신자들은 여전히 내세주의적 신
앙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본당들이 설립되면서 학당이나 학교운영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지역
주민을 위한 의식 계몽운동이 펼쳐졌고 사회복지와 의료사업 등 자선사업을 통
한 선교활동을 시작됐다.
사회복지 사업은 1888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입국 고아들을 돌보는
활동으로 출발했다. 뒤이어 진출한 베네딕도회를 비롯한 메리놀회 골롬반회 등
외국 선교회와 수도회들을 통해 영아원 고아원 양로원 등의 분야로 사회복지
활동이 확대되면서 선교의 폭을 넓어졌다.
특히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1931년)을 맞아 기념 병원이 추진돼 5년 뒤 명
동에 성모병원이 개설됐으며 ‘요리강령’ ‘천주성교공과’ ‘천주교 요리문
답’ 등도 간행 선교에 도움을 주었다.
또 한국 교회 사목을 편 선교사들은 본국 교회의 지원을 받아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설립하고 성직자 중심의 교회 체계를 강화해 1910년 한
일합방 당시 신자수 7만3517명에 성직자는 한국인 15명을 포함해 모두 61명 수
녀는 59명이던 것이 45년 해방 당시에는 9개 교구에 신자수 18만3666명 본당
163개 한국인 신부 136명 외국인 신부 102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신자수는 1905년부터 해방 때까지 비교해 보면 40년간 2.9배 증가하
는데 그쳤다.
다양한 교회출판물 보급
▲ 해방 후 시기〓이 시기는 일제시대와는 달리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
평신도 사도직단체들이 조직되면서 선교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특히 50년대는 6·25 전쟁 후 미국 천주교회의 엄청난 구호 물자 덕분에 민
생고에 시달리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찾아왔으며 6·25 전쟁을 겪으며
비통에 잠겨있던 국민들 가운데 인생의 참된 목적을 찾기 위해 입교하는 이들
도 생겨 16.6의 신자 증가율을 기록했다.
이와 함께 평신도 신심단체인 레지오 마리애가 1953년 도입돼 조직적으로
활동을 시작해 나갔다. 55년에 신자수 21만5554명 한국인 사제 195명이던 것이
불과 4년후에 신자수 41만7079명으로 두배 가량 증가했고 한국인 사제수는 238
명으로 늘었다. 급증하는 신자사목을 위해 외국인 선교사도 부쩍 늘어 1953년
87명이던 숫자가 59년 199명 62년 270명으로 증가했다.
이같은 교세에 힙입어 신자수 50만명을 넘게 된 62년에 독립된 성인교회로
출발하는 교계제도가 설정됐다.
60년대 선교활동은 외국 교회의 원조로 6·25의 영향으로 아직 가난을 극복
하지 못한 이들의 자립을 위한 사회개발과 사회복지 운동을 통해 이뤄졌다.
60년 시작한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고리대금에 시달리던 서민들에게 희
망을 주었으며 가톨릭 노동청년회 가톨릭 농민회 등을 통한 노동자 농민들의
권익운동 또한 사회복음화에 한몫 했다.
70년대 들어서는 특히 사회문제에 적극 관심을 갖고 부정부패 추방 인권회
복 사회정의 실현 등을 촉구하며 ‘행동’으로 나섰다.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
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된 74년에 교세는 100만명을 넘어섰다.
또 꾸르실료 그리스도 공동체 묵상회(M·B·W) 매리지 엔카운터(M·E)
성령쇄신운동 등의 신심단체들이 도입돼 직·간접으로 선교활동을 폈고 본당
연령회원들의 상가방문을 통한 봉사도 선교에 영향을 주었다.
공동번역 성서를 비롯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새로운 교리서 공의회 문
헌 등 다양한 교회 출판물의 보급도 선교에 한 몫을 했다.
생명·환경운동 등에 관심
▲ 1980년대 이후〓80년대 들어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했으며
‘직접 선교’에 대한 강한 의식과 사회복음화에 관심이 높아졌다.
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84년 200주년과 103위 시성식 89년 제44차 서
울 세계성체대회 등 대규모 행사가 치러지고 또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과정
에서 가톨릭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