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전을 후려치는 거센 파도 배가 춤을 추듯 흔들리고 있다. 바다는 점점
더 거칠어진다. 배멀미 때문에 속이 뒤집히는 것같다.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마
찬가지였을 것이다. 같은 바다를 지금 헤쳐나간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사제서품을 받기 위
해 중국 상해까지 타고 다녀왔던 ‘라파엘호’. 이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고난의 대장정에 나섰던 김대건 성인의 혼이 깃든 라파엘호가 154년만에
다시 닻을 올렸다. 제주교구가 올해 선교 100주년을 맞아 마련한 ‘상해―제주
간 라파엘호 해상순례단’은 작은 목선에 몸을 의지한 채 먼저 이 바다를 건넜
던 김대건 성인을 기리며 배멀미를 견뎠다.
이번 해상순례는 상해에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성인이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를 비롯해 교우들과 함께 귀국할 때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했던 사실
을 기념하고 성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역사찾기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순례
단은 사제 8명과 수도자 8명 평신도 33명 등 모두 49명. 대부분 항해 경험이
전혀없는 이들로 수녀 등 여성도 13명이 포함돼 있었다.
특히 최연소 참가자인 박재홍(12·요한 보스코·제주 광양본당)군이 학교수
업도 포기하고 참가한 것을 비롯해 모두 이번 순례를 위해 생업을 뒷전으로 미
뤘다. 이들 모두는 무모한 짓이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대건 성인의
고난을 직접 느끼고 싶다”며 강한 도전 의지를 보였다.
‘상해―제주간 라파엘호 해상 성지순례단’은 지난달 8일 오전 제주항을
떠나 중국 상해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이번 해상순례의 목표는 상해까지 라파
엘호를 모선(母船)인 제주대학교 해양실습선 ‘아라호’에 싣고 간 뒤 상해에서
부터는 라파엘호를 타고 단독항해로 제주도에 돌아오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항
해 방식도 돛으로 바람을 타거나 노를 젖는 등 옛 항해술을 그대로 이용하기로
했다. 김대건 성인과 선조들이 항해중 느꼈을 환희와 고통 위기상황을 몸소 체
험하기 위해서였다.
상해에서 김대건 성인이 서품을 받은 김가항성당과 첫미사를 봉헌했던 횡당
성당을 찾아 미사를 봉헌한 순례단은 이제 김대건 성인의 귀국여정을 그대로
재현해 라파엘호로 단독항해의 대장정에 오르는 일을 남겨두고 모두들 가슴설
레고 있었다.
그러나 ‘비극’이 시작됐다. 라파엘호는 국제선으로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
에 법 규정상 상해항에 하역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영사관과 해양수
산부를 통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로 안고
13일 오후 아라호를 타고 제주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주항에서
라파엘호를 내린 뒤 제주도에서 상해방향으로 100해리(약 185.2km) 정도 떨어
진 해상까지 끌고 나가 그곳에서부터 라파엘호를 운항하기로 계획을 일부 수정
했다.
라파엘호는 14일 밤 제주항을 출항해 먼바다로 항해를 시작했다. 순례단장인
현상보(제주교구 관리국장)신부와 서울대교구 이종남 신부(안식년) 등 6명이 먼
저 라파엘호에 승선해 망망대해를 헤쳐나갔다. 나머지 일행은 ‘아라호’를 타
고 뒤따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교대로 불침번을 서면서 라파엘호를 지켜보
았다.
좌우앞뒤로 마구 흔들리는 라파엘호 위에서는 몸을 가누기도 어려웠다. 옆
사람의 안전을 걱정할 여유조차 없었다. 자칫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빠져들 수
도 있었다. 하지만 김대건 성인이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한마디. ‘성모님이 여
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항해는 예상보다 더 험난했지만 순례단은
그 체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첫항해는 높은 파도로 출항 8시간만에 포기하고 제주도로 돌아와야
했다. 순례단은 해상상태가 좋아지는대로 먼바다로 나가 본격적인 항해를 재개
하기로 하고 16일 오전부터 제주도 근해에 머물렀으나 이번에는 태풍주의보로
인해 해상순례를 모두 단념하고 제주항으로 긴급 대피해야만 했다.
순례단 중 성직자 7명만이 인근 비양도에 라파엘호를 정박시킨 뒤 배를 지
켰다. 그리고 순례단은 19일 오후 용수리 포구에 다시 모여 교구민 지역주민들
과 한국순교자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는 이날 김대건
성인이 표착했던 용수리 포구를 기념성지로 선포했다.
기상악화로 예정보다 사흘이나 먼저 순례를 포기한 채 제주항으로 돌아와야
했던 순례단의 얼굴에는 아쉬움과 함께 자부심이 가득했다. 순례단은 “라파엘
호로 서해바다를 건넜던 김대건 성인의 노력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도전이었
는지 알 수 있었다”며 “이 작은 배로 풍랑을 헤치며 항해했던 김대건 성인의
신앙과 투지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성인을 더욱 흠모하고 존경하게 됐다”고 입
을 모았다.
순례단장 현상보 신부도 “원래 계획은 실패했지만 신앙전래의 역사를 발
굴·재현하고 순교정신을 체험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만큼 의미있는 시도였다”
고 강조했다.
제주교구는 용수리 표착에 성지를 조성해 기념관을 건립하고 라파엘호를 영
구보존 전시할 계획이다.【제주〓서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