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천년기 교회사에서 선교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는 언제일까. 교회사가들은 15세기부터 약 3세기를 꼽고 있다. 1492년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 각국은 활동무대를 지중해 연안에서 전세계로 넓혀나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선교활동의 대상은 중세시대와 다르게 수십만 수백만명으로 확대된다.
항해술의 발달로 미지의 대륙들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유럽인들은 자국의 영토확장과 경제적 이익 등을 목적으로 앞다투어 정복을 시도했다. 정복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선교가 자연스럽게 병행되었고 따라서 이 시기의 선교활동은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정책이라는 정치적인 측면이나 경제적 측면과 결부돼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선교활동이 순전히 식민지 확장의 부수적인 과정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선교활동들은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서 비롯됐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자성과 쇄신노력을 더욱 촉발시켰고 예수회를 비롯해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 등의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려는 순수한 열정을 안고 해외선교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교활동에 힘입어 가톨릭 교회는 유럽의 교회에서 명실공히 세계적인 교회 보편적인 교회가 됐다. 물론 그 과정에서 복음선교의 본질적인 의미가 적지않게 퇴색되기도 했지만 세계 선교활동은 교회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역사의 한 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메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선교는 1492년 콜롬부스(1451∼1506)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한 이후 시작됐다. 1498년 콜롬부스의 제2차 서인도제도 탐사항해에는 교황 알렉산더 6세의 배려로 미니모회의 수도자 부일과 사제 11명이 선교사로 동행했으며 이를 계기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수많은 선교사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났다.
라틴 아메리카의 선교는 주로 예수회와 프란치스꼬회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서인도 제도에서는 1493년 프란치스꼬회가 처음 진출한 이후 1500년에 이미 원주민 세례자 수가 3000명에 이르렀고 1516년에는 7개 교구를 가진 교회로 성장했다. 멕시코에서는 스페인의 코르테스가 원주민 처녀를 개종시킨 이후 1530년에 멕시코 시티에 교구가 설립됐다. 뒤이어 1531년에는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1534년에는 과테말라 등지에도 교회가 생겨났다.
남아메리카에서는 16세기초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에서 선교활동이 시작됐으며 특히 콜롬비아에서는 1513년에 이미 교구가 설립됐다. 페루 선교는 1524년에 시작돼 1545년에는 리마 대교구가 설정됐고 칠레의 경우 1540년에 선교활동이 시작된 후 21년만인 1561년에 산티아고 교구가 출범했다. 이렇게 해서 1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라틴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거의 전지역에 대한 선교가 이루어졌다.
한편 북아메리카에서는 1608년 프랑스의 사무엘 드 삼플린이 퀴벡에 진출하면서 가톨릭이 도입됐고 1632년부터는 예수회원들이 캐나다에 진출해 선교활동을 벌여 1658년에는 대목구가 설정됐다. 미국의 경우 가톨릭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독립전쟁후였지만 16세기 중반에 스페인의 선교사들이 플로리다 뉴멕시코 텍사스 등 남부지역에 진출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아프리카]
십자군 원정 이후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해상항로와 전초기지를 개발하면서 시작된 아프리카 선교는 1486년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에 1498년에는 모잠비크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됐다. 특히 콩고는 1491년 왕이 포르투갈 선교사들에 의해 세례를 받으면서 아프리카 선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실제로 1518년에는 콩고 왕의 아들이 주교로 임명되기도 했는데 그는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주교로 알려져 있다. 이후 앙골라 모잠비크 등지에 복음이 전해졌고 17세기에 들어와서는 마다가스카르와 아이보리 코스트에도 선교사들이 진출했다.
[아시아]
아시아 선교의 첨병은 예수회원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다. 그는 포르투갈 왕의 요청으로 예수회가 인도선교에 참여하게 되자 동료이자 예수회 창립자인 이냐시오 로욜라로부터 선교사 사명을 부여받고 또 교황사절의 자격으로 파견돼 1542년 인도 서부 고아에 도착했다. 그는 인도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관습을 존중하면서 선교활동을 펼쳐 수년동안 수천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어 말레이반도를 거쳐 1546년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그는 다시 동료 몇 사람과 함께 일본선교에 나서기로 하고 1549년 마침내 일본으로 건너가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그는 또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선교활동을 계속하려 했으나 1552년 중국 본토가 바라보이는 한 섬에서 사망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선도적인 선교활동에 힘입어 예수회는 아시아 선교를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해 많은 선교사들이 인도와 중국으로 진출했다. 특히 인도에 파견된 예수회의 로베르토 데 노빌리(1577∼1656) 신부는 토착주민들이 복음을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토착인들의 문화와 생활관습에 어느 정도 맞추도록 해야 한다는 ‘적응주의’ 선교방식을 주창했다. 그의 적응주의는 상당한 성과를 거둬 1650년경에는 인도의 마두라 지역의 신자 수가 4만명으로 늘어났다.
중국선교에도 이런 적응주의 선교방식이 적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선교사가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원인 마태오 리치(1552∼1610)다. 수학자요 천문학자인 그는 1582년 마카오를 통해 중국에 들어간 후 1600년 이후에는 북경에서 궁정학자로서 활동하면서 선교활동을 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설명하는 데 도움받기 위해 중국 고전 문학과 사상을 깊이 연구하여 이른바 유교사상을 보완한다는 ‘보유론’(補儒論)의 입장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천주실의’를 비롯한 그의 저술들은 조선의 실학자들에게도 전해져 조선 천주교회의 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마태오 리치의 적응주의 선교방식이 성공을 거둬 그의 사망 당시에는 중국 지도층의 신자만 2000명을 헤아리게 됐다. 리치에 이어 중국에 들어온 독일 출신의 예수회원 아담 살(1592∼1666)도 같은 선교방식을 채택했고 아담 살의 사망 당시 중국의 신자 수는 27만명에 이르렀다.
한편 17세기 초 일본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면서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인도차이나 반도로 내려오자 예수회원들이 이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됐고 캄보디아와 타일랜드 등에도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