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신앙때문에 행방불명 또는 순교한 교회 인사의 수가 수백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전쟁 발발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에 대한 명단조차 제대로 작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의 ‘무관심’이 가장 큰 원인이다.
더욱이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지난 한세기를 마감한다는 의미에서 6·25 순교자들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가 절실히 요구되나 교회의 관심과 재정적 뒷받침의 부족으로 가시적 성과없이 연구가 정체돼 있는 상태다.
물론 각 교구별로 6·25 순교자들에 대한 사료를 수집하는 등 자료발굴 노력이 진행됐지만 그 성과면에서는 미비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지난 97년 각 교구별로 자료를 받아 주교회의 사무처에서 작성 교황청에 제출한 ‘20세기 한국 현대 순교자’ 명단 역시 추가 보완작업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 목록에는 천주교 개신교 성공회 등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순교한 총 215명(천주교 관련 순교자 158명)의 명단이 들어있으나 관계자들은 광범위한 학살행위가 이루어졌던 당시의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이 숫자는 매우 미흡한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교황청에 제출된 215명의 명단 가운데 평신도의 경우 제주와 전주교구 이외에는 다른 교구 소속 신자가 전혀 들어있지 않으며 실제로 두 교구 외의 대부분 교구로부터는 명단이 도착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교회의 산하 북한선교위원회가 90년에 작성한 6·25 순교자 117명에 관련된 후속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공적분석을 통한 시성시복운동은 엄두도 못내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 순교자 연구 가운데 평신도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대부분의 평신도 순교자의 경우 자료를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일부 후손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납북 및 순교경위가 파악되고 있을 뿐이다. 이밖에 전쟁 당시 고난을 당했던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순교사실이 일부 확인되고 있으나 전쟁발발 50여년이 지난 지금에는 이들 목격자들이 사망함으로써 앞으로 정확한 사실 고증이 어려워질 전망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사 담당자들은 6·25 순교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앞서 순교자 발굴작업과 목격자 증언채록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6·25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발굴과 나아가 시복시성 추진은 앞으로 여러 난관이 예상된다. 현대 순교자 목록은 광범위하고 전문적인 연구작업이 선행돼야하는 대규모 작업이지만 이를 담당할 교회내 전담기관과 전문인력이 극히 미비한 상태이기에 희생자들이 순교가 아닌 전쟁 매몰자로 구분돼 교회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전공하는 한 성직자는 이에 대해 “한국의 교회사는 문헌중심으로 연구되어왔기 때문에 현대 순교자에 대한 어록채취 등에 상대적으로 약한 면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편 6·25 당시 ‘죽음의 행진’에 끌려가 전쟁이 끝난 후 극적으로 생환한 춘천교구 조선희 필립보 크로스비 신부(성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지난 93년 본지(제238호 6월20일자)와 인터뷰에서 신앙 때문에 박해받은 6·25 희생자들이 ‘순교자’임을 증언한 바 있다.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사제들이 피란을 떠나지 않은 까닭은 ‘본당에 남아 신자들을 돌보라’는 교구의(주교) 지시도 있었지만 ‘신자들을 두고 피란가는 것이 양들을 돌보는 목자가 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을 모두들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희생자가 많아졌고 따라서 이들을 순교자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 크로스비 신부의 증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를 토대로 할 때 당시 공산군에 의해 피랍되거나 피살된 성직자·수도자들은 대부분 박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실천하거나 교회를 지키려 했다. 따라서 관계자들은 우리교회는 ‘제2의 박해기’에 해당하는 6·25 순교자 연구에 본격적으로 나서야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이주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