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중엽에 이르자 서구에서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물결이 이탈리
아 특히 피렌체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옛 그
리스·로마의 사상과 문학과 예술을 새롭게 인식하고 이를 재생하려는 운동 또
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르네상스 문화에서는 중세사회의 신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강조하는 인문주의(humanism)가 큰 특징을
이루고 있었고 이 흐름은 16세기 초반 종교개혁을 촉발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그리스도교 정신 안에 수용하여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부르짖은 이들이 있으니 이들을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라고 부
른다. 이 시대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로 우선 로렌조 발라(1407∼57)를 들 수
있다. 로마 태생의 그는 고전 희랍어와 라틴어 문헌 분석 전문가로서 역량을 발
휘해 이른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 중세의 위조 문서임을 폭로했다. 13
세기초 이래로 교황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4세기에 증여한 문서에 입각해서
교황이 서유럽에서 세속적인 지배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이 문서가
거짓임을 입증한 것이다. 또 그는 라틴어 불가타 성서와 희랍어 성서의 비교 분
석을 통해서 사도 성바오로의 사상을 올바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로 마르실리우스 피치노(1433∼99)
와 특히 그의 제자 요한 피코(1463∼94)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피렌체의 신플
라톤 학회 회원으로서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등 고대 및 중세의 사상을 그리스
도교와 융합하고자 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 서구 사회
에 처음으로 플라톤을 널리 소개했으며 피코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라
는 저서를 통해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는 없다”고 인간 존엄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원하기만 하면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
도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전통과 고대의 신비주의 등을 섞은 혼합주의자로 비
판받기도 하지만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에 틀림없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는 유럽 전역으로 파급됐고 여기
에서 르네상스시대 가톨릭 인문주의의 거장 에라스무스(1467∼1536)가 배출됐
다. 에라스무스는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에 입회하여 1492년 사제로 서품된 그는
인문주의 공부에 필수적인 라틴어와 희랍어에 몰두했고 이어 프랑스·영국·이
탈리아 등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토마스 모어를 비롯한 각계 인사와 친분을
맺으며 인문주의에 몰두했고 나중에는 북유럽 인문주의자들의 지도자가 됐다.
에라스무스는 로마의 치체로 이후 가장 뛰어난 라틴어 문장의 대가였다. 그
는 역설을 능란하게 사용하여 당시의 그리스도교 사회의 부패상을 날카롭게 풍
자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미련함의 찬미’(일반적으로
‘우신예찬’으로 알려져 있음)에서 스콜라 철학의 현학과 교조주의 그리고 대
중의 무지와 미신적 태도를 풍자하였다. 또 ‘대화’에서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
워 당시 그리스도교 사회를 이렇게 개탄했다. “왕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성직
자들은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싸우고 신학자들은 삼단논법을 지어내고 수도자
들은 수도원 밖을 배회하고 평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에라스무스는 ‘대화’
를 쓴다.” 이보다 앞서 발표한 ‘그리스도교 병사의 소교본’에서는 성직자들
의 무지와 탐욕 부패 등을 통박하면서 복음의 정신으로 되돌아갈 것을 촉구했
다.
에라스무스는 편집활동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수많은 고대 저
작 특히 교부들의 저서들을 출판했으며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펴내기도 했다.
또 그리스도교 교육과 혼인 전쟁과 평화 등의 주제에 관한 숱한 논문들을 발표
했다. 특히 강력한 평화 애호자인 그는 ‘평화의 불평’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
로 싸운다는 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불화를 중재하고 정
의를 구현하여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결속을 호소했다. 또 문제
해결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어느 상황에서나 올바르지 못하므로 이단에
게도 폭력을 사용하기보다는 인내와 관용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그의 평화론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많은 이에게 큰 영
향을 미쳤다.
이런 저작들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그의 관심사는 종교와 문화를 정화
하여 인류를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성서 본문과 교회 교부들에게로 되돌아감으
로써 교조주의에 치우친 신학을 새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새로 발견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이다. 복음은 특정인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모든 언어로 읽혀져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상설교의 지혜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살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 교회가 내적으로 정화되어 모두가
진실하고 완전한 친교와 우정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활동으로 인해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자들의 왕자’로 불린다. 그
러나 역사적으로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평화를 위한 그의 노력을 높
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리적인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양측의 눈치
만 살폈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다. 그러나 성서로 돌아가 복음의 정신에 충실하
고 대립보다는 용서와 화해를 통한 평화로운 쇄신을 도모하고자 한 그의 노력
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이 시기 영국의 대표적인 가톨릭 인문주의자로는 토마스 모어(1478∼1535)가
있다. 그는 변호사와 하원의장을 거쳐 1529년에 잉글랜드의 대법관으로 임명됐
다. 그러나 그는 잉글랜드 교회를 국가에 종속시키려 한 영국 국왕 헨리 8세에
맞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끝까지 충실하다가 단두대에서 순교했다. 에라스무스
와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토마스 모어는 1516년에 발표한 ‘유토피아’에서 그
시대의 정치·종교·사회상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가공의 섬나라 유토피아 주민
들은 그리스도교 계시나 은총 없이도 잘 살고 있는데 복음을 알고 있는 유럽인
들이 그렇게 살지 못함을 빗대어 그리스도교 사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16세기 초반까지 유럽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
치면서 한편으로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이르는 길을 터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끝까지 가톨릭 안에 충실히 머물고
자 노력했다.【이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