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주제: 유신시대 명동성당에서의 민주화운동
김녕(한국정치 전공 서강대학교 교수)
⊙ 예언자적 소명으로 불의에 맞서
인권과 정의의 보루 교회 성장에 큰 기여
명동성당이 ‘시대의 아픔과 민중의 눈물을 품어 이 땅에 민주주의를 탄생시
킨 모태(母胎)’이며 ‘격랑의 현대사 속에서 불의와 폭력 인권침해 등에 예언
자적 소명의식을 갖고 당당히 맞섰다’는 점에 국민들은 묵시적으로 합의하고
있다. 언론에서도 명동성당을 ‘민주화의 성지(聖地)’라고 부른다. 정치와 사회
환경이 크게 변한 지금도 국민들은 “한국사회의 고뇌와 눈물이 밴 정의의 보
루”로 자리잡은 명동성당이 변함없이 그 역할과 소명의식을 보여주기를 바란
다.
교회의 사회·정치적 개입이 활발했던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말까지 한국
사회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농촌사회의 피폐 이농현상의 가속과 도시빈민의 증
가 빈부격차 심화와 외채증가 부정부패 등 심각한 부작용을 수반했다.
명동성당은 이 시기인 1962년 6월29일 서울대교구 주교좌본당이 됐고 김수
환 대주교가 68년 5월29일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한데 이어 69년 4월30일 추기
경에 서임됐다. 이후 김 추기경은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한 진보적이고 초교파
적인 입장으로 가톨릭 교회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
1968년 1월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을 계기로 교회는 처음으로 사회·정
치적 상황에 직접 개입했다. 특히 가톨릭교회와 국가와의 갈등은 명동성당이 시
위대의 ‘소도’(蘇塗)이자 민주화운동의 성역으로 자리잡게 된 ‘지학순 주교
사건’이 발생하고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된 시점인 1974년부터 심각해졌다. 그
이후 교회의 민주화·인권운동은 명동성당을 주축으로 다양하게 벌어졌다.
특히 1978년 ‘동일방직 사건’을 비롯한 노동운동 79년 ‘오원춘 사건’을
비롯한 농민운동 78년 ‘7·6 사건’을 비롯한 교권수호활동 74년 ‘민주회복
국민회의’ 결성과 76년의 ‘명동 3·1 사건’ 등 민주화운동 정의구현사제단
의 활동이 명동성당 안에서 울려 퍼짐으로써 그 중요성이 더욱 크게 부각됐다.
1974년 ‘지학순 주교 사건’을 계기로 교회가 국가의 압력에 대항해 나아
갈 보다 적극적인 주체가 절실히 필요하게 됨에 따라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사제들이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조직했다.
‘명동 3·1 사건’은 1970년대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 중에서 가
장 큰 파장을 일으킨 대표적 사례다.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와 가
톨릭과 개신교의 합동기도회에서 ‘민주구국선언’이 낭독됐고 개신교 목사 여
섯명 가톨릭 신부 다섯명 등 성직자만 11명이 이 사건과 관련돼 구속됐다.
이상의 사례들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실현을 위해 개입했던 많은 사례들 중 대표적인 것이다. 1970년대 유신시기
(1972∼1979)에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교회와 국가간에 첨예한 갈등을 일으켰던
많은 사건들은 한국의 민주화운동 및 인권운동에 있어 중요한 촉매역할을 했다.
또 가톨릭교회의 사회참여는 한국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6·29선언’ 이후 민주화가 다소 진전되어 교회의 정치적 개입이나 역할
이 줄어들게 됐으나 가톨릭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
명의 존귀함 도덕성과 인성(人性) 사회 정의와 공동선 등이 심각한 위기에 처
한 이 시대에 예언자로서 그리고 도덕적 교사로서 교회의 역할은 더욱 절실하
다. 그 한가운데에 명동성당이 있다. 명동성당은 앞으로도 복음의 빛으로 이 세
상 곳곳을 바꾸고 주님의 뜻대로 정의를 바로 세우며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명동성당’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