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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되돌아보는 제2천년기의 교회쇄신 노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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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뤼니 수도원과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의 영향으로 11세기 중반 이후
서구 그리스도교 사회에서는 초대 교회의 복음적 청빈과 사도적 생활로 되돌아 가려는 자발적인 노력들이 다시 일어났다. 특히 십자군 원정은 가난한 그리스도 를 본받고 성서를 통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을 배우려는 사람들의 열망을
자극하였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 비친 교회는 지나치게 부유하고 속화되어 있었다. 주교 와 성직자들은 세속의 권력과 결탁해 있었고 수도원 역시 엄청난 부를 향유하 고 있었다. 교회의 이런 모습은 복음정신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였다. 청빈의 이 상을 실천하려는 열망이 도처에서 일어났고 성직자·수도자들뿐 아니라 평신도 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런 청빈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리용의 부유한 상인인 베드로 발두 스에 의해 시작된 ‘리용의 가난한 이들’이라고 불리는 평신도 운동이었다.
자신의 재산이 많은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던 발두스는 1173년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사람들에게 가난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곧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그리스도의 가난한 이들’ 또는
‘리용의 가난한 이들’이라고 불리게 됐다.

그런데 현지 교회 당국의 눈에는 이들이 달갑지 않게 보였다. 성직자의 지도 를 받지 않는 평신도들만의 모임인 데다가 교회의 부유함을 거세게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용 주교는 평신도들은 신앙문제에 대해 언급할 자격 이 없다며 그들의 설교를 금지시켰다.
발두스는 곧 교황에게 호소했고 교황 레오 3세는 1179년 그의 청빈정신을
치하하면서도 설교 허가 여부는 리용 주교에게 일임했다. 리용 주교는 다시 그 의 설교를 금지시켰고 발두스는 재차 로마에 호소했다. 그러나 교황 루치오 3 세는 1184년 그에게 설교활동을 금하고 그의 청빈운동에 대해서도 비난했다.

발두스는 이에 반발하다가 교황에 의해 파문 당하자 지하로 숨어 들어갔으 며 그 추종자인 발두스파는 이후 종교개혁 때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갔다. 비록
교회로부터 배척받고 나중에 이단으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발두스의 청빈운동은
복음적 청빈을 실천하려는 숭고한 정신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이 시기의 또 다른 이단 ‘카타리파’는 비록 가난을 부르짖었지 만 참다운 교회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순수함’ 또는 ‘순전무구함’이라 는 뜻의 카타리파는 12세기 중엽 프랑스 남부의 알비를 중심으로 번성했다고
해서 ‘알비파’라고도 불렸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독일을 중심으로 신속히 퍼 져 나간 카타리파는 영혼과 육신 물질과 정신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에 입각해
물질의 소유는 물론 결혼과 육식(肉食)까지도 배척했다.
카타리파는 가톨릭 교회에 맞서 모든 재물을 배척하는 대립 교회를 내세우 고 자신들만이 모범적인 금욕생활을 하는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인이라 자처하면 서 로마 교회를 맹비난했다. 또 국가와도 투쟁하고 나서 황제를 사탄의 대리자 로 제후를 사탄의 조수로 불렀다. 카타리파와 교회 및 국가 권력과의 대립은
마침내 1209년부터 20년간 ‘알비 전쟁’이라는 잔혹한 전쟁으로 이어졌고 전 쟁의 결과 카타리파는 대부분 소멸됐다.

그러나 교회 안에 충실히 머무르면서 자발적인 청빈을 실천함으로써 교회의
쇄신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탁발(托鉢 구걸)수도회 의 창시자 성 프란치스코(1181·82∼1226)와 성 도미니코(1170∼1221)가 그들이 다.

아씨시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원래 기사가 되고자
했으나 1205년 한 한센병 환자를 만나 그에게서 가난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는
가난의 길을 택했다. 그는 입고 있던 옷마저 모두 아버지에게 돌려 드리고 완전 한 자유인이 되어 복음을 설교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사회의 가장
낮은 사람들이란 뜻에서 ‘작은 형제’라 불렀으며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 세의 허락을 받아 작은 형제회(프란치스꼬회)를 세웠다. 최초의 탁발수도회가
탄생한 것이다. 프란치스꼬회는 불과 10년만에 회원이 3000명에 이를 정도로 급 속하게 발전했다.

도미니코는 스페인 출신으로 사제가 되어 1204년 로마를 여행하던 중 프랑 스 남부에서 카타리파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개종을 위해 복음적 청빈에 바탕 을 둔 순회 설교가로서 헌신하기로 했다. 그래서 인근에 설교 중심지를 세웠는 데 이것이 도미니꼬 수도회의 기원인 ‘설교 수도회’였다.
도미니꼬 수도회는 처음에는 아우구스티노의 회칙을 따랐으나 곧 프란치스 코의 청빈 회칙을 채택함으로써 프란치스꼬회에 이어 두번째 탁발수도회가 됐 다. 그러나 도미니꼬 수도회는 설교를 중심 과제로 삼았기에 자연히 학문과 연 구에 치중하게 됐다.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 수도회로 대표되는 탁발수도회들은 이전의 수도회 와 달랐다. 우선 수도자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즉 수도원까지도 사유재산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수도자들은 참으로 가난하게 살기 위해 노동을 했고 때 로는 순수하게 구걸을 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탁발수도회란 명칭은 바로 여기에 서 나온 것이다. 또 이들은 일정한 장소에 머물러서(정주) 수도생활을 하는 것 이 아닌 모든 수도원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게다가 구걸을 하거나 복음을
설교하기 위해 도시를 활동 무대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이 탁발수도회들은 복음적 청빈정신과 내적 신심을 바탕으로 중세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들의 정신은 오늘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수도회는 보나벤투라 알베르토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 은 대학자들을 배출 중세 교회 학문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수도 회는 또 포교수도회로서 이슬람 세계뿐 아니라 동양선교에도 나섰고 특히 프란 치스꼬회는 중국에까지 선교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창훈 기자】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1999-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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