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일산 신도시 정발산 기슭의 아담한 단독주택. 키 작은 나무 울타리를
비켜 안으로 들어가면 빨간색 편지함이 앙증맞게 서있는 그림 같은 집이다.
국내 최고령 사제인 임충신(93·마티아) 신부는 5월의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어두울대로 어두워진 눈 때문에 커다란
돋보기를 좌우로 움직여가며 책을 본다. 방안 가득한 초여름의 밝은 햇살도 노
안(老眼)에는 별 소용이 없는 것 같다.
“신부님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으세요?”
“옛날에 나온 ‘경향잡지’예요. 다른 책들은 활자가 작아서 보기가 힘들어
요.”
경향잡지를 건네받아 살펴보았다. 1938년 발행. 1938년이면 그가 사제서품을
받은 지 7년째 되는 해로 황해도 은율본당과 신천본당을 거쳐 서울 소신학교에
서 교사로 근무할 때다.
“내가 1907년에 태어났으니까 ‘경향잡지’(1906년 창간) 영인본 호수와 나
이가 똑같이 나가요. 그래서 지금 저 책장에 꽂혀있는 영인본의 어느 부분을 펼
쳐보아도 다 익숙한 얘기들이에요. 옛날에 내가 한 말도 군데군데 그대로 실려
있는 걸요.”
규칙적인 산책 습관 유명
이쯤되면 그의 독서는 세월을 거슬러 떠나는 과거로의 여행이다. 커다란 돋
보기 하나 들고 떠나는 여행. 그래서 그런지 그는 매일 아침 산책을 나갈 때도
두툼한 잡지 영인본과 돋보기를 빼놓지 않는다.
“신부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임 신부는 귀에 보청기를 꽂았지만 소리가 가물가물한지 아예 노트와 펜을
건넸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다. 증손자 뻘 되는 기자에게도 좀
체 말을 낮추려 하지 않는다.
“눈 어두운 것보다 귀 어두운 게 더 불편해요. 매일 미사드리고 산책나가는
것 말고 특별히 하는 게 없어요.”
그의 규칙적인 산책습관은 유명하다. 1968년 은퇴 후 구파발성당에서 생활할
때도 매일 오후 2시에 출발해 북한산성과 벽제 등을 돌아 어김없이 5시에 귀가
했다. 요즘도 오전 10시30분이면 집을 나가 2시간 후에 돌아온다. 전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산책 도중에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 뿐.
사제생활 68년째를 맞는 그는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다.
그는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11살 때 용산 신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매화동
본당에서 운영하는 봉삼학교 교사인 부친이 “너는 천주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
의 영혼을 구하는 신부가 돼라”며 서울로 보낸 것이다. 그의 신학교 동기가 노
기남 대주교(84년 선종)·윤형중 신부(79년 선종)·이복영 신부(58년 선종)인 것
을 보면 ‘살아있는 역사’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 하다.
그는 지금도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로마 가톨릭 미사(MISSALE
ROMANUM)’ 경본을 펴놓고 라틴말로 미사를 봉헌한다. 한국에서 라틴어의
최고 권위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라틴어에 정통한 그는 우리말보다 라틴어가
더 자연스럽다고 한다.
방 한쪽 벽에는 사제 서품식(1931년 5월30일)을 마치고 동기 신부 2명과 함
께 찍은 흑백사진이 외롭게 걸려있다.
“왼쪽은 김피득 신부이고 오른쪽은 김경민 신부인데 김경민 신부는 6·25
때 빨갱이한테 잡혀갔어요. 신학교 동기가 10명인데 나 혼자 남았어요. 일제 때
는 왜놈들 6·25 난리 때는 빨갱이들 속에서 다들 고생스럽게 사목을 한 동기
신부들인데 왜 보고 싶지 않겠어요. 많이 보고 싶지….”
그는 소신학교 시절 철부지 동창생들과 울고 웃었던 순간들을 그림으로 표
현한 책을 한 권 갖고 있다. 그림책에는 김치와 고추장뿐인 식사시간 라틴어
장려 목적으로 교내에서 조선말을 하는 학생에게 무거운 쇳덩어리를 들고 다니
게 했던 호랑이 신부님 성탄 때면 장난감을 선물해주던 교장 신부님 등이 등장
한다.
신학교 시절 얘기 책으로
그림책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
“우리는 외출할 때 모자는 썼으나 모표가 없었다. 길거리에 나가면 아이들
은 우리를 고아라고 놀려댔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한테 모표를 만들어 달라고
떼를 쓰자 어느 날 선생님이 모표를 만들어 오셨다. 우리 신학교의 주보이신
‘예수성심’을 뜻하는 ‘SSC’를 얼기설기 엮어놓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좋아
서 의기양양하게 모자에 달고 나갔더니 이번에는 아이들이 모표를 보고는 ‘꽈
배기 학교’라고 놀려댔다.”
그는 “동창 신부들과 옛 생각을 하며 깔깔거리고 재미있게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그림이 무슨 뜻인지도 모를 까마득한 옛날 얘기”라고 말했다.(이
그림책은 지난해 가톨릭출판사에서 ‘노 사제가 만화로 남기는 신학교 이야기
들’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정말 이태리 소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의 주인공 돈 카밀
로 신부와 비슷한 데가 많다. 무뚝뚝하고 검소한 성격 그리고 공산당을 싫어하
는 것은 영락없는 돈 밀로 신부다.
황해도에서 사목하다 해방을 맞은 그는 공산당 때문에 고생도 많았다. 공산
당이 성당과 수도원을 빼앗고 신부들을 마구 잡아가는 바람에 산 속으로 피신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6·25전쟁이 터지고 국군이 평양으로 진격할
때까지 황해도 곡산에서 고집스럽게 성당을 지키고 있었다.
“국군이 마을에 들어왔다길래 산에서 나와 환영회에 나갔지요. 옷이 없어서
검은 색 저고리에 로만 칼라를 끼우고 꾀죄죄한 무명바지를 입고 나갔는데 색
경(거울)을 보니 위는 신부고 아래는 영락없는 거지더라고요. 천주교 신자라는
젊은 장교가 저를 보고 ‘어떻게 여태까지 북한에 남아있었냐’며 무척 놀라더
라고요.”
그의 검소한 생활은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다. 인터뷰를 하는 날도 무
릎을 몇 겹씩 재봉질한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실내화도 앞부분이 터졌는
지 파란색 테이프로 감은 것을 신고 있었다. 35년 전 어느 목수 신자가 짜주었
다는 투박한 나무 책상은 윤기가 잘잘 흐르는 골동품 같다. 책장에는 출판된 지
40 50년은 족히 넘었을 책들이 누렇게 색깔이 변한 채 꽂혀있다.
구수한 강론 고정팬 생겨
그를 곁에서 보살피고 있는 효성 지극한 조카 임인섭(백석동본당 주임)신부
와 임옥엽(42·마리아)씨도 큰아버지 신부의 검소함에는 두 손을 든 상태. 임
마리아씨는 “남들 보기에는 창피하지만 신부님이 그런 생활을 편안해 하시니
까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놀랍게도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백석동성당에 나가 미사를 집전한다.
구수한 옛날 이야기를 곁들여 직접 강론도 해 ‘고정 팬’이 생겼을 정도다.
“신부가 미사드리는 게 뭐 새삼스럽냐”며 무뚝뚝하게 넘길 뿐 더 이상의 얘
기는 없다.
한국 교회 최고 원로의 지혜를 빌릴 요량으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따끔한
회초리 같은 충고를 기대하며.
“신부님 보시기에 한국 교회가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신학교 들어갈 때 신자가 8만 명이었는데 지금은 400만 명 가까이
되잖아요. 신부와 수녀들 그리고 신자들이 열심히 전교한 덕분에 많이 발전한
거예요. 다들 잘하고 있어요.”
“그래도 요즘은 신부님처럼 검소하게 사시는 분들이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