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신문은 창간 11주년을 맞아 이번 호부터 ‘되돌아보는 제2천년기의 교
회 쇄신 노력’을 기획 시리즈로 마련한다. 이 기획 시리즈는 지난 천년 동안의
세계 교회사에서 일어났던 교회 쇄신 노력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지난 역사에서의 교회 쇄신 노력들이 새 천년기를 앞두고 있는 오
늘의 교회에 던지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반성하고자 한다. 편집자
2000년 전에 태어난 나자렛 사람 예수를 구세주요 메시아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오늘날 전세계 인류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고 인류의 삶에 지대
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출발은 그러나 아주 초라했다. 예수를 죽
인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다락방에 숨어 지내고 있던 예수의 제자들. 그들은 십
자가에 못 박혀 죽은 스승이 부활하여 자신들에게 여러 차례 발현한 것을 보고
도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80년 로마제국 교회로 성장
그런데 이들에게 큰 변화가 생긴다. 유대인들의 명절인 오순절에 그들은 그
때까지의 숨어 지내던 다락방 생활을 청산하고 갑자기 대중들 앞에 용감히 나
서 스승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
도교의 출발이 된 이 역사적인 사건을 성령 강림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출발한 그리스도교는 수많은 사람을 감화시켜 예루살렘은 물론 안티
오키아와 시리아 이집트와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까지 급속도로 확산
되어 나갔다. 그러나 곧 시련이 닥쳤다. ‘폭군’으로 유명한 로마의 네로(재위
54∼68)황제에 의해 시작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이후 250년 동안 계속
됐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박해의 와중에서도 그리스도교는 날로 성장해 갔고 300년께에는 로마제국
5000만 인구 중 그리스도교 신자가 이미 800만명을 헤아렸다. 마침내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재위 306∼337)는 313년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를 제국
전역에 허용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다.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확고한 지지를 기반으
로 더욱 교세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380년께 그리스도교는 이미
로마제국의 교회 곧 국가교회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교회는 이미 또 다른 위기를 맞고 있었다. 국가교회가 됨
으로써 영세자들이 급격히 늘어났지만 이로 인한 교회의 대중화는 복음정신의
구현이라는 교회 본연의 모습이 퇴색되는 문제를 낳은 것이다. 이보다 더욱 큰
문제는 교회 내부로부터 솟아오른 이단과의 싸움이었다. 또 황제의 교회 개입이
빈번해지면서 황제의 권력(속권·俗權)에 교권(敎權)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단의 문제는 교회가 공의회들을 통해서 대처해 나갈 수 있었다. 니체아 공
의회(325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에페소 공의회(431년) 칼체돈 공의회
(451년) 등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여러 이단과 이설들을 거슬러 교회의 정통 교
리를 하나하나 확립해 나갔다.
박해가 끝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는 못하지만 고행과 금육 등 엄격한
수덕생활로 신앙을 실천하려는 이들이 늘어갔다. 홀로 사막을 찾아 은수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럿이 함께 살면서 같은 정신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
다. 이들이 수도생활의 기원을 이루었다. 또 본당 사제의 독신제 대주교와 총
대주교 교황의 수위원 등 여러 가지 법적·제도적 장치들이 마련 발전됨으로
써 교회의 교계제도가 확립된 것도 이 시기였다.
한편 로마제국의 수도가 330년에 비잔틴(콘스탄티노플)으로 옮겨지면서 콘스
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지위가 크게 격상됐다. 이후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되
면서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
회에서 로마 주교 다음 가는 지위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공의회 통해 정통교리 확립
더욱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라틴교회라고도 함)와 교리에 있어서 관심사가 달랐다. 동방교회는 신비적
이고 사변적인 쪽으로 치중한 반면 서방교회는 구체적이며 법적인 문제에 관심
을 쏟았는데 그 같은 차이는 종교분야뿐 아니라 문화전반에 걸쳐서 나타난 일
반적 현상이기도 하였다. 이같은 양 교회의 입장 차이와 주교들의 잦은 대립은
후에 동서 교회의 분열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476년 서로마제국의 붕괴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그리스도교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교회는 우선 서로마제국의 새 주인이 된 게르만 민족
을 맞아 야만족으로 간주되어온 그들을 교화시키고 복음을 전하는데 주력했다.
게르만 민족을 완전히 복음화 하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스페인·프랑스·
북이탈리아·영국 등지를 점령한 게르만 민족의 여러 부족을 개종시키면서 이
미 그리스도교화된 로마 문명과 게르만 민족을 융화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7세기말에는 서구 유럽의 대부분이 그리스도교 세계가 됐고 1000
년께에는 독일을 비롯해서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폴란드·헝가리·체코·
불가리아·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사회 전체가 그리스도교화됐다.
한편 8세기에 들어 이슬람교도인 사라센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로마 교황
은 당시 게르만 부족들의 여러 국가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프랑크 왕국에 도
움을 호소했고 이를 계기로 해서 교황과 황제가 서로 협력하기에 이른다.
특히 중세기 서구 유럽의 최고 지배자인 칼(재위 768∼814)대제는 게르만인
에 의한 로마제국을 재건하고 거기에 그리스도교를 접합시킴으로써 중세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토대를 놓았다.
유럽 전체가 그리스도교화
자신을 구약성서의 다윗 왕에 비기면서 ‘왕이요 사제’라고 자칭한 그는
교회 내부 문제에도 깊숙이 개입해 교리개혁의 일환으로 주교들에게 교회회의
를 개최하도록 하고 교구를 방문할 것을 요구했으며 교구 사제들에게는 공동
생활을 수도자들에게는 베네딕도회의 규칙을 의무화했다. 또 전례에도 큰 관심
을 가지고 로마전례로 통일을 시도했고 그레고리오 성가를 장려했다.
그러나 칼 대제는 주교나 수도원장 등 성직자들을 국가 관료화함으로써 교
회를 속화시켰고 후대에는 교황이 귀족들의 정치놀음에 희생당하는 ‘교황직의
암흑시대’(867∼1046)를 맞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의 사망 후 제국이
몰락하면서 로마의 귀족들이 교황을 마음대로 임명하고 파면시키기도 하였다.
교황직의 암흑시대는 1046년께 3명의 교황이 한꺼번에 생긴 사건에서 그 극에
달했다.
요컨대 교회사의 첫 천년기는 팔레스티나에서 출발한 그리스도교가 로마로
전파되면서 로마제국의 국가교회로 발전하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이후에 유
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하나의 그리스도교 세계를 형성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는 교리적·신학적 체계를 확립하고 교회생
활의 법적·제도적 체제를 갖추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속화와 교권의
실추라는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