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이시돌목장 .
해발 350m 한라산 중턱에 펼쳐진 280만평의 광활한 목초지에는 700여 마리
의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어쩌다 엄마에게 장난치며 뛰어다니는 송아지
등을 봄바람이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임피제(71·제주교구 금악본당 주임)신부가 개척한 이
시돌 목장은 이처럼 처음 보는 이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지금은 규모가 많이 줄었지만 한 때 300만평이 넘은 이 목
장에서 800여 마리의 양과 1000마리가 넘는 젖소들이 뛰놀기도 하였다.
금발머리 회색 눈동자. 목장 내에 위치한 이시돌회관에서 만난 임 신부는
외모로 보나 국적으로 보나 분명 아일랜드인이다. 하지만 제주도의 가난을 몰아
내고 삶의 희망을 준 제주도민의 대부 임피제 신부의 제주 사랑 은 칠순을 넘
긴 고령에도 계속되고 있다.
저녁 8시30분이 되어서야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임 신부와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요즘 근황을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임 신부는 열심한 신
자들과 살아서 아주 행복해요 라며 활짝 웃는다.
임 신부는 아침 6시면 일어나 이시돌회관의 새벽미사와 금악본당의 낮 12시
미사 이시돌 양로원의 미사 등 많을 때는 하루에 네 번 미사를 집전한다. 자신
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시돌농촌개발협회 의 업무를 처리한 후 직접 승용차
를 운전해 봉성체를 다니는 등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
다. 목장 내에 있는 양로원의 노인들과 한림읍내 이시돌의원을 돌아보는 일 이
시돌회관에 피정 온 신자들에게 강의를 하고 고해성사를 주는 일도 결코 소홀
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10년은 거뜬하게 일할 수 있어요. 아버님이 수의사셨는데 팔순이 넘
어서도 손수 차를 몰고 가축의 병을 치료하거나 새끼를 낳는 것을 돌봐주러 다
니셨죠. 저도 어린 시절부터 목초를 가꾸며 소와 양을 기르는 것을 보며 자랐어
요. 초등학교 때 이미 소젖 짜는 법을 배웠고 아홉 살부터 운전도 했어요.
임 신부가 제주도민들에게 목축업을 가르친 것이나 또 지금도 건강을 유지
하며 목장과 양로원 병원 수녀원 등을 돌아보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달
란트인 듯 하다.
임 신부는 1928년 남아일랜드 도네골의 작은 마을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가난한 사람을 보면 언제든지 도와주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었고 모친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저녁 때 가족과 함께
기도를 드리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분이었다.
임 신부의 본명은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Patrick James McGlinchey). 임
씨라는 한국 성은 당시 교구장이었던 해롤드 대주교가 붙여 준 것이고 피제 라
는 이름은 15년 전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직원들이 패트릭 제임스 의 영문
첫글자 발음을 따서 지어주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한 외국인 사제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제주도에 첫발을 디
딘 이래 고향인 아일랜드보다 제주도에서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제주도민
들에게 이런 열정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포에서 목선을 타고 10시간만에 도착한 제주도에서 고국 아일랜드의 해
변 정경을 보았어요. 돌담 사이로 고향에서 많이 느껴본 바닷바람이 불고 있더
군요. 초상났을 때 온 마을사람들이 상가에 모여 밤새도록 지켜주는 장례풍습도
아일랜드와 비슷하고요.
6·25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1954년 제주도에 파견된 임 신부는 45
년간 제주도 발전의 역사와 함께 한 산 증인답게 옛 기억을 떠올렸다. 임 신부
가 처음 부임한 중앙본당 한림공소에는 당시 25명의 신자와 피란을 온 수녀 몇
명만 있을 뿐 성당 건물도 없는 곳이었다. 보리나 조 농사를 짓거나 해녀들이
잡아오는 해산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마디로 참담했어요. 가난에 찌들려 있던 제주도민들은 날이 갈수록 생활
이 더욱 비참해져 가고 월 3∼5부에 이르는 높은 이자에 쪼들리다 자살하는 사
람도 많았어요.
빚더미에 앉아 있는 주민들을 위해 임 신부가 가장 먼저 벌인 일은 신용협
동조합을 설립한 것. 신자들을 필리핀까지 보내 신협교육을 받도록 하고 지역주
민들까지 조합원으로 끌어들인 결과 신협을 통해 자금을 마련해 사업을 벌여
성공한 사람이 생기고 주민들은 경조사비를 융자받아 무사히 큰 일을 치렀다.
처음 사목할 때 재미있는 일화가 없느냐는 질문에 임 신부는 신자들 중에
도 굶는 사람이 많았을 때라 미군 신자에게 엽총 한 자루를 빌려 꿩을 잡아먹
었어요. 그 때 꿩고기를 물리도록 먹어서 지금은 입에도 대지 않아요 라며 빙그
레 웃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이 있다. 공장에 취직해 부산으로 간다며 인
사를 하고 떠난 16살 소녀가 3개월만에 물탱크에 빠져 죽었다 는 소식과 함께
화장된 채로 돌아온 것이었다. 물질을 잘하는 제주 소녀가 익사했다는 사실을
지금도 믿지 않아요. 만약 그때 가난한 소녀들이 고향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
었다면 돈을 벌러 도시에 나가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래서 면양을 기르고 양털에서 실을 뽑아 옷감을 짜는 한림 수직사 를 설립했
죠.
간혹 어떤 이들은 임 신부가 그 동안 펼친 사업의 외양이나 규모만 보고 사
목보다는 사업에만 매달린 성직자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숲은 보되
나무를 보지 못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임 신부는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신앙
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어느 정도 물질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호품이나 얻어다 주는 일보다는 스스로 노력해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경제적 자립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던 임 신부는 이따금 사냥을 하러
올라가 보았던 한라산 중턱의 황무지를 개간하면 훌륭한 목초지가 될 수 있다
는 생각을 하게 됐다. 목축업이야말로 기후나 자연환경이 좋은 제주도에 적합한
사업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59년부터 한림 주변의 땅을 개간해 성 이시돌 중앙실습목장 을 만들고 젊은
이들에게 본격적으로 풀을 건조시켜 저장하는 법과 돼지와 양·젖소 기르는 법
등을 교육했다. 또 해안 주변에만 모여 살던 주민들에게 450만평의 땅을 분양하
고 돼지와 양을 나눠주어 230가구의 개척농가를 탄생시키며 축산업을 일으켰다.
목장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임 신부는 62년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
회 를 설립해 좋은 품종의 가축을 보급했다. 그리고 점차 사료공장 우유공장
축산물 가공공장 치즈 공장 등을 세워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
시돌 목장은 당시 돼지만 해도 1만2000두를 보유한 동양 최대의 양돈농장으로
72년 소문을 듣고 찾아온 고 박정희 대통령이 목장을 둘러본 뒤 감명을 받았을
정도였다.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의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다. 그러나 임 신부는 이 사
업들이 정상궤도에 오르면 미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