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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출판물 및 영상물 봉정 장면(위), 브뤼기에르 주교와 이금도 신부(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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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모퉁이 돌,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 파리외방전교회) 현양 감사미사가 9월 13일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서울개포동성당(주임 염수의 신부)에서 열렸다.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사업의 불씨를 지피고 키워온 개포동본당 신자들은 또 이날 브뤼기에르 주교 묘비와 흉상 제막식 등을 통해 ‘현양할 수 있도록 해주심’에 대해 감사 기도를 바치고 주교의 삶을 일상 속에서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이날 세워진 묘비는 중국 마가자(마찌아즈, 馬架子) 현지 브뤼기에르 주교 원묘비를 탁본으로 재현한 것이다. 개포동본당은 또한 그동안 전개해온 문화현양사업 결과물인, ‘착한 목자 브뤼기에르 주교’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와 서한집’ 등 현양 출판물 및 영상물의 봉정식도 함께 갖고, 주교의 삶을 추모했다.
염수정 김운회 두봉 주교를 비롯해 파리외방전교회 주교단과 교구 사제단이 함께한 이날 미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은 미사 강론을 통해 “개포동본당 덕분에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생애와 업적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고마움을 전하고 “주교님의 숭고한 선교열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적극 나서자”고 당부했다.
개포동 본당은 지난 3년 동안 수차례 중국을 방문하며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비를 세우는 등 한국교회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사업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개포동본당은 또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사업을 결산하며 최근 ‘제가 하겠습니다’ 운동을 전개, 1천여명이 장기기증 및 사후 각막기증에 서약하는 등 주교의 삶을 따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운동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사로 자원하면서 한 말인 ‘즈 뵈 페르’(Je veut faire, 제가 하겠습니다)에서 빌려온 말이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1792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15년 사제품을 받은 뒤 해외선교에 뜻을 품고 1825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이후 태국으로 간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9년 태국 방콕에서 주교품을 받았으며, 1831년 9월 조선 포교지를 조선대목구로 설정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됐다.
주교는 이후 중국대륙을 횡단하며 조선 입국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뇌일혈로 끝내 조선땅을 밟지 못한 채 중국 마가자에서 1835년 10월20일 선종했다. 그의 유해는 모방 신부에 의해 현지에 묻혔다가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한국으로 옮겨와 서울 용산성당 성직자 묘역에 안장됐다.
◎“신앙선조에 대한 사랑 본받겠습니다”
묘비 발견에 도움 준 중국인 이금도 신부
“신앙 선조들을 본받고 따르려는 한국교회의 열정에 놀랐습니다.”
서울 개포동본당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사업의 성과 중 하나로 꼽히는 묘비 발견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중국인 이금도(리진타오) 신부는 첫 한국교회 방문 소감을 ‘감동’으로 대신했다.
“신앙 선조들에 대한 사랑, 열심한 기도생활, 이웃에 대한 아낌없는 나눔 등 한국교회 신앙인들의 모습은 정말 대단합니다. 중국 교회도 본받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신부가 없었다면 브뤼기에르 주교 묘비는 영원히 찾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문화혁명때 파손돼 유실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대세였다. 그런데 지난 1월 이금도 신부가 우연한 기회에 묘비를 발견, 개포동본당에 ‘묘비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려 온 것. 브뤼기에르 주교 묘비는 초대 조선교구장의 묘비 라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 사상 최초로 발견된 박해시대 묘비라는 점에서 학계와 교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수도원과 장애인 복지시설 등을 둘러 볼 계획이라는 이 신부는 “중국으로 돌아가면 이곳에서 받은 은총과 기쁨을 함께 나눌 것”이라고 말했다.“중국의 신자들도 위험을 무릎쓰고 신앙 전파를 하신 브뤼기에르 주교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돌아가면 한국에서 얼마나 브뤼기에르 주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알릴 생각입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린 기도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광호 기자
woo@catholictime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