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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교구 북수동본당 주일학교생들이 방화수류정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바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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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인 수원 화성(1796년 축조)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수원 화성 4개 누각(정찰 혹은 전망을 목적으로 세운 정자)중 하나인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의 서쪽 벽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방화수류정 자체도 8각 지붕을 기본으로 남북에 합각을 더 세워 십자(十)형으로 되어 있다.
교회 사학자들은 화성 축조에 큰 영향을 준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십자가 문양을 넣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원 북수동본당 나경환 주임신부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세계적 문화유산인 화성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며 “대 석학 정약용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누가 수원화성에 십자가를 새겼을까?
“정약용이 늘 신앙 간직했다는 증거”
서쪽 벽 곳곳 십자가 문양 뚜렷히 드러나
석학 정약용에 관한 지속적 연구 뒤따라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동양 성곽의 백미, 수원 화성(1796년 축조)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과연 있다면 누가 왜 그곳에 십자가를 새겨 놓았을까.
우연히 들은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과 각종 자료를 뒤졌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화성에 십자가가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화성을 주제로 떠난 수많은 기행문에서도 십자가를 보았다는 기록이 없었다.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가장 먼저 화성에 인접한 수원교구 북수동성당을 찾았다. 성당에서 만난 몇몇 신자들을 붙잡고 물어 보았지만 “화성에 십자가가 있다는 이야기 처음 들어본다”고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신자들에게 물어 보였지만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모른다”였다. 그 때 옆에서 한 중등부 주일학교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십자가 아주 많아요. 우리는 수없이 보았어요.”
귀가 번쩍 띄었다. 어른들이 보지 못한 것은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아이들을 앞세워 길을 나섰다. 성당을 벗어나 5분 정도 걷자 화성 방화수류정(정찰 혹은 전망을 목적으로 세운 누각의 하나)의 화려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이 먼저 달려가 손가락으로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있었다. 십자가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서쪽 벽이었다.
“정약용이 마음 속으로는 늘 천주교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의도적으로 십자가 새겨
수원 성지를 개발한 교회사 학자 김학렬 신부(수원교구 능평본당 주임)는 “서쪽은 당시 서양의 학문 즉 천주교를 의미한다”며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을 의식하며 의도적으로 서쪽 벽에 십자가 문양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따라서 “화성에 새겨진 십자가는 화성 축조에 큰 영향을 준, 정약용이 자신의 정체성을 암암리에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북수동본당 나경환 주임신부도 “아직도 많은 이들이 세계적 문화유산인 화성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며 “대석학 정약용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시작했다. 방화수류정을 찾은 많은 관광객들이 그 광경을 신기한 듯 쳐다 보았다.
◎화성과 정약용 그리고 천주교
화성은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채제공의 총괄아래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정약용은 특히 거중기를 고안, 화성 축조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이는 예수회 선교사 테렌츠(Terrenz, J, 鄧玉函)의 ‘기기도설(奇器圖說, 1627)’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화성 축조 이후 경기도 암행어사를 거쳐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 신부의 변복 잠입 사건이 터지자 형 정약전과 함께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됐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됐는데,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자 또 다시 그 해 10월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정약용은 이후 1818년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고향집(마현)에서 남은 생을 보냈으며 1836년 75세로 생을 마쳤다.
우광호 기자
woo@catholictime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