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기형아를 낳을지라도 난 그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리라`고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유난히 겁 많은 내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데는 까닭이 있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믿고 있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설마 건강치 못한 내게 그것도 마흔이 넘어 선물로 주시는데 건강한 아기를 주시지 않겠나 하는 작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과 두 아이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내가 70살까지 돈을 벌어야 막둥이 공부를 시키겠지"하며 남편은 기뻐했다. 둘째 딸도 드디어 자기 동생이 생긴다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한창 사춘기인 중2 큰 아들은 엄마가 늙어 주책이라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난 그런 아들에게 만약에 네가 `엄마 저는 살아있어요. 저도 사랑 받고 싶어요. 저를 꼭 지켜주세요`라고 외치는 듯한 아기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면 분명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서운한 마음을 대신했다.
평소에 사소한 것에도 근검절약하며 살았던 우리 부부는 더 절약하며 살아야했다. 누군가 보건소에 가면 임산부에게 필요한 영양제와 기형아 검사 등 모든 것을 무료로 해준다는 말에 집에서 조금 먼 보건소를 기쁘게 다녔다. 임신 5개월 정도가 될 즈음 기초 기형아 검사를 해주며 만약 이상이 있으면 전화한다고 했다.
전화가 없어 안심하고 있던 어느 날 아침, 공무원 출근 시간도 아닌 오전 8시쯤 전화벨이 울려 불안한 마음으로 받아보니 보건소 임산부 담당자였다. 그는 지극히 사무적인 딱딱한 어조로 "한광주님, 태아가 다운증후군과 일반 기형아 수치가 어마어마하게 높은데 어떻게 할거냐. 이래도 낳을 생각이냐"며 따지듯 내게 되물었다.
순간 난 너무 무섭고 기분이 불쾌했다. "내 뱃 속에 있는 아기를 당신이 무슨 권리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냐"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화를 받기 전엔 잠잠했던 태아가 보건소 담당자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불안에 떨며 마구 발길질을 하며 요동을 쳤다. 난 따뜻한 손으로 배를 살살 문지르며 태아에게 말했다.
"아가야. 걱정하지 마. 엄마는 네가 혹시 기형아라도 낳아서 잘 키울거야. 우리는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단다."
그러자 정말 기적처럼 그렇게 쉴 새없이 불안의 발길질을 하던 아기가 잠잠해졌다. 그 후부터 나는 더욱 더 태아를 사랑하게 되었고, 성경을 읽고 쓰며 기도하는 것으로 태교를 열심히 했다.
그래도 연약한 사람인지라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에서 임신 중에 약을 복용하거나 산모가 나이가 많으면 기형아를 낳을 확률이 아주 높다는 보도나 기사를 보면 작은 믿음이 흔들려 불안이 엄습해왔다. 그럴 때마다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늘 묵주를 들고 기도했다. 내겐 성모님과 예수님 `백`이 있으니 아무 걱정없다고 큰소리를 치며 지친 몸과 마음을 애써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내고 있을 즈음 큰 아이가 준비물을 집에 두고 가서 학교에 갈 일이 생겼다.
그런데 아들의 눈빛이 엄마의 임신 사실을 부끄러워 하는 듯 해 난 교실 벽에 붙어 불룩한 배를 최대한 작게 보이려고 숨도 멈추고 준비물을 전해준 뒤 혹시라도 누가 볼세라 죄지은 듯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오는 발걸음이 왜 그리 무겁던지….
난 체구가 작으면서 아이를 크게 낳는 편이라 일찍부터 자궁이 내려앉아 조산 기미가 보였다. 그래서 거의 누워서 지냈고, 변비가 심해 2시간 이상을 화장실에 있는 날이 많아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다가 아들의 그런 눈빛을 보니 내 자신이 너무 측은했다.
한광주(가타니라, 서울 창4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