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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사피엔자 대학 교황 특별강연 왜 취소됐나
교황이 주일 삼종기도 연설을 하는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지난 20일 약 20만 명이 운집했다. 여느 주일에 비해 4~5배가 넘는 숫자였다. 로마 총대리 카밀로 루이니 추기경의 요청으로 모인 대학교수들, 학생들, 일반 시민과 가족들 그리고 정치인들이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대한 지지와 애정을 표현하고자 모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
교황청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17일 로마의 사피엔자 대학에서 하기로 했던 새학기 개강 특별강연을 하루 전날인 16일 취소했다. 이 대학 물리학부 교수들을 포함한 67명의 교수가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과학에 적대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고, 일부 학생들도 이에 동조하면서 이 대학 총장실을 점거하는 등 항의소동을 벌인 데 따른 것이다.
대학 교수들은 교황이 추기경 시절인 1990년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에서 한 강연 내용을 문제 삼았다. 라칭거 추기경이 오스트리아 출신 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1924~1994)의 글을 인용해 `갈릴레이 시대에 교회가 갈릴레이보다 훨씬 이성적이었을 뿐 아니라 갈릴레이에 대한 재판도 이성적이고 공정했다`는 입장을 보였다는 게 그들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전체 맥락을 보지 못한 아전인수격 해석이라는 지적이다. 라칭거 추기경은 계몽주의 이후 신앙에 대한 이성의 승리 또는 종교에 대한 과학의 승리를 기정사실해온 지적 풍토의 변화 현상에 대한 예로 갈릴레오 사건에 대해 다른 견해를 보인 파이어아벤트의 글을 인용했다. 추기경이 인용한 내용은 이렇다.
"불가지론자이며 회의론자인 철학자 파이어아벤트의 판단은 훨씬 더 극단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갈릴레이 시대에 교회는 갈릴레이보다 훨씬 더 이성에 충실했다. 그리고 갈릴레이의 학설(지동설)이 윤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미치는 결과들도 고려했다.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 재판은 이성적이고 공정했다….`"
라칭거 추기경은 파이어아벤트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명시적 표현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종교재판을 관장하던 교황청 부서의 최고 책임자(오늘날 신앙교리성장관으로, 라칭거 추기경의 당시 직책)가 `교회가 훨씬 이성적이었고 재판도 공정했다`는 내용에 대해 "훨씬 더 극단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 자체가 파이어아벤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추기경은 이렇게 덧붙인다. "위의 언명(파이어아벤트의 글)을 토대로 성급한 호교론을 구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일 것이다."
말하자면 라칭거 추기경의 글은 갈릴레오 재판에서 교회 입장이 더욱 이성적이었음을 옹호하는 게 전혀 아니다.
◇또 다른 문제는 없나
사피엔자 대학 교수들과 일부 학생들이 교황의 방문을 방해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종교와 무관한 세속의 종합대학의 신학기 개강식에 가톨릭 종교 지도자가 특강을 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게 한 가지 이유다. 교황이 특강하러 사피엔자 대학에 오는 것은 물리학자가 성탄절에 교황을 위해 노래를 부르러 시스티나 성당에 가는 것과 다를바 없다고 한 반대자는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 또는 `과학의 윤리적 이용`을 강조하는 교황의 핵심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과 교황의 최근 행보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보수로 회귀한다고 못마땅해 하는 반감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교황의 날
문제의 사피엔자 대학은 설립된 지 700년이 지난 이탈리아 최대의 종합대학이다. 교수진은 4500명이고 학생 수는 13만 명에 이른다. 이런 대학이 전체 교수의 3에 불과한 60여명의 교수들의 항의와 학생들의 농성으로 예정된 교황의 강연이 취소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에서 그것도 교황의 교구인 로마에서 현대 세계의 대표적 지성이기도 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강의를 취소할 수밖에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로마 교구 총대리인 카밀로 루이니 추기경은 교구민들에게 호소했고, 교황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신자들이 변함없는 지지와 애정을 드러내고자 20일 바티칸으로 모여든 것이다. 이탈리아 언론들은 이 날을 `교황의 날`이라고 불렀다.

▲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1일 교황 서재 발코니에서 성 베드로 광장에 운집한 군중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이날 모인 20만명의 인파는 교황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와 애정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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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황성하를 사랑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문구가 적힌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성베드로 광장에 모인 학생들에게 교황은 "다른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정신으로 진리와 선을 추구하라"고 격려했다. 【외신종합】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