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도지역 천주교 신자들은 교우촌을 이루고 살며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가했다. 사
진은 1920년대 `간도 신앙의 못자리`라고 불린 팔도구성당과 마을 풍경.
|
일제 수탈을 피해 북간도로 올라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천주교인들이 독립군 군자금 모금활동에 깊숙이 관여한 사실이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만주지역 본방인 재류금지(在留禁止) 관계잡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이 사료집에 따르면 간도지역 천주교 청년들을 모아 대한의민단을 결성한 박창래(당시 36살)는 군자금 모금 책임을 맡아 용정에서 주로 군자금을 모으다 체포돼 3년간 재류금지 처분을 받았다. 오지화는 "무기구입 자금모집을 분담하여 당원 신대용 등과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용정촌 부근에서 기부금 강요에 힘써온 인물"로 기록돼 있다.
# 간도 천주교회, 만주 독립운동의 근거지
이 같은 활동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간도지역 천주교회사를 살펴봐야 한다.
간도는 영토상 중국에 속해 있었지만(논란 중인 1909년 청ㆍ일 간 간도협약이 유효하다는 전제로) 교회는 조선대목구에서 파견된 외국 선교사들 도움으로 성장해나갔다. 신자들은 싼값으로 비옥한 토지를 매입해 농사를 지은 덕분에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했다. 한 예로 1919년 팔도구에서 최문식 신부가 마적떼에게 납치된 것을 비롯해 공소 신자가 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 지역 신자들은 거뜬히 큰 돈을 만들어 교우를 찾아오곤 했다.
교세(1928년)도 천주교 신자는 1만2257명으로, 장로교 신자수에 비해 두배 이상 많았다. 즉 간도 천주교회는 간도의 3ㆍ13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이 지역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기반이 됐다고 볼 수 있다.
간도 천주교인들의 독립운동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성당 정오 삼종기도 종소리에 맞춰 시작된 이 만세운동은 천주교ㆍ개신교ㆍ천도교 등 북간도 종교단체 인사들이 참여한 조선독립의사회가 주관했다(한국민족운동사료 3ㆍ1운동 편). 이때 천주교 신자촌인 대교동 향교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했는가하면 장백현 신자 30여 명은 혜산에 있는 일본경찰서를 습격했다. 간도 천주교인들은 대한의민단뿐 아니라 왕청현에 근거를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신민단에도 참여했다.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신문(1920년 1월 26일자)은 "28개 공소와 수천명 신자수를 헤아리는 천주교 무리 중에 안중근과 같은 무명의사가 많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 청산리전투 무기조달에 결정적 기여
이와 관련해 고 한도준 신부가 평화신문(1993년 8월 15일자)을 통해 증언한 내용은 간도 천주교 독립운동을 매우 구체적으로 전하는 귀중한 자료가 됐다.
"교우촌 신자들은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독립군을 열심히 지원했다. 세린하라는 동네에 살 때 공출 책임자였던 부친은 낮에 교우집을 돌며 식량 옷 돈 등을 거둬 두었다가 야밤에 장총과 육혈포를 찬 독립군이 오면 건네주곤했다. 특히 두만강 근처 세관에 근무하던 한윤화(시몬)가 청산리전투 무기조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독립군이 무기가 부족해 애태울 때, 회령에 도착한 일본 무역상 돈이 마차에 실려 용정으로 올라갈 예정이라는 정보를 독립군에게 넘겼다. 독립군은 오랑캐고개에서 그 마차를 습격, 돈 궤짝을 빼앗아 달아났다."
그러나 대한의민단은 이후 일제의 노골적 종교탄압과 중국 공산당 출현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만주지역 한인들 독립운동이 격렬해지자 일제는 신앙자유 불간섭에서 종교탄압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또 마적과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간도 상황이 악화되자 천주교인들은 교회 보호와 유지를 위해 한 발 물러서야 했다. 당시 한국교회를 관할하던 파리외방전교회는 독립운동을 정교분리원칙 위반으로 보고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하는 입장이었다.
윤선자(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간도교회 독립운동은 당시 교회의 일반적 상황이 정교분리론에 의해 일제 침략에 무관심하도록 유도된 사실과 대비해볼 때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