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순 한국평협 회장
▨제6장 민족들의 발전과 기술
이 장은 새 회칙의 마지막 장이다. 새 회칙은 여기서 기술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룬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 기술 문제를 인간학적 관점에서 구명한 이후 이 문제를 이렇듯 체계적으로 다룬 것은 이 회칙이 처음이다.
교황은 인간의 프로메테우스 같은 사고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만일 인간이 기술이 이룩하는 `기적적 성공`을 이용해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민족들의 발전은 퇴보하게 된다. 경제 발전도 이와 마찬가지로 금융의 `기적적 성공`에 의지해 부자연스럽고 소비주의적 성장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거짓이요 해로운 것이 되고 말 것이다"(68항).
그러므로 인간은 방종으로 흐르지 않는, 진정으로 인간다운 자유에 대한 사랑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하느님께서 마음에 새겨주신 자연적 도덕법의 기본 규범을 알아봐야 한다.
"기술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땅을 일구고 돌보라`(창세 2,15 참조)고 하신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을 드러내는 인간과 환경 간의 결연을 더욱 굳건히 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69항). "기술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물리적 한계를 벗어나 인간의 지평을 넓혀 줌으로 인간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도덕적 책임에서 우러나온 결단으로 기술의 매력에 대응할 때 비로소 진정한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으로 책임성 있는 기술 사용에 대한 교육이 시급하다"(70항).
"오늘날 기술 절대주의와 인간의 도덕적 책임 간에 벌어지고 있는 문화 투쟁의 가장 중요한 싸움터는 생명윤리 분야로, 여기서 완전한 인간 발전의 가능성 자체가 근본적으로 의문의 대상이 된다… 근본적 질문은 인간은 과연 자기 자신의 노력의 산물인가, 아니면 하느님께 달려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 과학적 발견과 기술적 개입 가능성은 대단한 진전을 이뤄 두 가지 유형의 합리성, 곧 초월성에 대해 열려 있는 이성의 그것과 내재성 안에 닫혀 있는 그것 간의 선택을 강요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극적 문제들 앞에 이성과 신앙은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오로지 둘이 함께 할 때 비로소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 단지 기술에 의존하는 것에만 매료되면, 신앙 없는 이성은 자신이 전능하다는 착각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성 없는 신앙은 사람들의 구체적 생활과 단절될 위험이 있다"(74항).
사회 문제는 이제 근본적으로 인간학적 문제가 됐다고 교황은 지적한다. 즉, 그것은 생명공학에 의해 인간이 인간 생명이 잉태되는 방법뿐 아니라 인간 생명이 조작되는 방법을 더욱 더 좌지우지하게 됐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이제 생명의 근원을 파악해 모든 신비를 밝혀냈다고 믿는",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전적으로 환멸을 불러 일으키는 문화"(75항) 안에서 체외수정, 배아 연구, 인공적 방법으로 부모와 유전적으로 똑같은 아이를 만드는 클로닝 가능성 등이 촉진되고, 낙태 외에도 체계적 우생학적 출산계획이 은밀히 실행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편에서는 안락사를 지지하는 사고 방식이 침투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인간 존엄성을 부인하는 문화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물질주의적이고 기계론적 인간 생명관을 촉진하게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누가 과연 측정할 수 있을까? 무엇이 인간적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구별하지 못하는 양심은 세계의 가난한 이들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교황은 여기서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일체이므로 발전은 물질적 성장뿐만 아니라 정신적 성장도 포함해야 한다"(76항)는 점을 강조한다.
"기술 절대주의는 물질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비물질적이고 정신적 차원의 삶을 많이 체험한다. 진정한 발전은 인간사에 대한 물질주의적 비전을 넘어 설 수 있는, 발전 안에서 기술이 줄 수 없는 `저 너머 그 무엇을` 직감할 수 있는 새로운 눈과 새로운 마음을 필요로 한다. 이 길을 걸어감으로써 진리 안의 사랑의 추진력을 근거로 방향을 잡아 나아가는 완전한 인간 발전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77항).
▨결론
"발전에 가장 크게 이바지하는 것은 사랑을 활활 타오르게 하고 진리의 지도를 따르며 이 둘을 모두 항구한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이다"(78항). 하느님을 받아들이면 이웃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고 각자 삶을 연대 정신으로 기쁘게 살아가야 할 임무로 이해하게 된다. 반면에 무신론은 창조주를 망각하고 인간적 가치들조차 망각함으로써 발전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비록 그것이 당장 이뤄질 수 없더라도, 비록 우리가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언제나 우리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하느님 사랑은 우리에게 모든 이의 유익을 추구하는 일을 해나갈 용기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