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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종로구 홍지동에서 옷 수선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선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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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재봉틀 앞에서 다른 사람의 옷을 내 옷처럼 손질하며 살아온 이가 있다.
그에게 줄자와 바늘, 실, 가위가 따라다닌 지 50년이 넘었다. 고사리손으로 재단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벌써 반 세기가 훌쩍 넘었다.
"내가 두 번이나 전화했어요. 옷은 집으로 가져가세요? 쇼핑백에 넣어가면 구겨지는데…."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서 명품 수선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선장(펠릭스, 67, 홍은동본당)씨가 한 여성 손님에게 손질한 원피스를 잘 개어 넣어준다. 26㎡(8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재봉틀 다섯 대와 다리미, 수천 가지 색의 다양한 실들이 빼곡히 놓여 있다.
"아무리 싼 옷이라도 내 옷이라고 생각해야 정성들여 손질할 수 있어요."
그는 당대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단골 손님으로 드나들었던 실력 있는 재단사다. 그는 언론에 소개됐을 법한 삶을 살아왔다. 그의 나이 열두 살, 그는 열차를 오르내리며 신문을 팔던 신문팔이 소년이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으로 먹고 살기 힘든 배고픈 시절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 양복점의 재단사를 보면서 삶이 바뀌었다. 그는 명동에 있는 이름난 재단사를 찾아가 일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왕십리 집에서 명동 양복점까지 걸어다니며 통나무 덧문을 여닫는 일부터 시작했다.
당시 양복 한 벌이 쌀 세 가마 값일 정도로 양복이 비쌌던 시절, 그는 유명한 영화배우의 양복도 제작했다.
"지금은 전기 다리미를 쓰죠. 그때는 숯 다리미를 썼어요. 박석고개(은평구 갈현동)에서 우마차로 숯을 실어오면 무악재까지 지게꾼을 데리고 나가 숯을 가져오고…."
1980년대 들어 기성복이 본격 등장하면서 맞춤양복은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그는 리비아로 건너가 건설 현장에서 세탁소를 운영했다. 리비아 한인공소에서 교리교사로 봉사했던 그는 한국인 현장 근로자 50여 명을 모아 놓고 저녁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등 외로운 이들에게 신앙을 심어줬다. 연령회 봉사도 도맡아 했다.
한국에 들어와 수선집으로 간판을 바꿔 단 그는 손님들 옷을 고쳐주는 수선일로 전향했다.
손님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멀리 평택과 의정부, 가평에서 오는 사람도 있고, 45년이나 된 단골손님도 있다. 주인의 마음씨와 솜씨를 헤아리는 이들이다.
성직자나 수도자 또는 교회기관에서 제대보나 성탄 구유의 아기예수 이불을 주문할 때는 "그건 제가 봉헌하는 겁니다"는 말로 돈을 받지 않는다.
그의 손때 묻은 재봉틀과 실, 작업 도구가 있는 공간에는 성모상과 묵주가 놓여 있다. 김씨는 "내가 세상을 떴을 때 내 한 몸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