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밀 카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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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카폰(1916~1951) 신부.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신학교 시절 번역한 「종군 신부 카폰」의 주인공인 카폰 신부의 시복과 명예훈장 추서를 기원하며 두 달 동안 1000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순례한 사람이 있다. 미국 뉴멕시코주 갤럽에 사는 존 무어(61)씨다.
무어씨는 지난 9월 11일 뉴멕시코주 산타페 국립묘지를 출발, 카폰 신부의 고향인 캔자스주 위치토교구 필센에는 재향 군인의 날인 11월 11일 아침에 도착했다. 그가 순례한 거리는 1014km에 이른다. 하루 평균 25km 이상 꼬박 두 달 동안 걸은 셈이다.
미국 주교회의 산하 가톨릭 뉴스 통신인 CNS에 따르면 무어씨는 손으로 깎아 만든 나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걸었다. 나무 십자가는 한국 전쟁 당시 병사 수십 명의 목숨을 구하고 북한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선종한 카폰 신부의 상징이었다. 카폰 신부와 같은 전쟁포로 출신으로, 카폰 신부에게 큰 감화를 받은 제럴드 핑크씨가 직접 디자인한 십자가였다.
무어씨가 카폰 신부를 알게 된 것은 지난해 가을 콜럼버스 기사단 잡지에서 카폰 신부에 관한 짧은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무어씨는 국가를 위해 최악의 처지에 놓인 병사들을 위해 헌신한 신부의 무용담에 금방 빠져들었다.

▲ 존 무어씨가 지난 9월 하순 나무 십자가를 메고 산타페 고속도로를 따라 순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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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폰 신부는 캔자스주 필센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체코에서 온 이주민이었다. 1940년 6월 사제품을 받은 카폰 신부는 1943년 해링턴 공군 기지에서 군종신부로 사목하다가 1944년 육군 군종사제로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잠시 군복을 벗었다가 1948년 재입대한 카폰 신부는 1950년 일본에서 근무하던 중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7월 한국에 파견됐다.
카폰 신부는 포화가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종군 사제로서 조금도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사목했으며, 총탄을 헤치고 부상당한 병사를 구한 공로로 1950년 9월에는 동성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카폰 신부는 1950년 11월 1일 밤 병사들을 구하려다가 중공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몸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부상당한 전우들을 돌보려고 일부러 체포된 것이다. 이후 북한 벽동에 있는 중공군 포로수용소로 이송된 카폰 신부는 1951년 5월 23일 수용소에서 임종할 때까지 가톨릭 사제로서뿐 아니라 종교를 떠나 수용소에 있는 무수한 병사들에게 영혼의 위로자요 목자로서 헌신해 `전장의 그리스도``성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종군사제로서 카폰 신부가 보여준 용감한 군인정신과 그리스도를 닮은 헌신적 삶이 알려지면서 이미 1954년에 「종군 신부 카폰 이야기」(The Story of Chaplain Kapaun)라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은 2년 후 당시 신학생이었던 정진석 추기경에 의해 「종군 신부 카폰」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한국에 소개됐다.
이미 1990년대부터 카폰 신부의 시복시성을 위해 관련 증언 등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한 위치토교구는 2008년 6월 29일 교구 차원의 시복시성 조사를 공식 시작했다. 하느님의 종 카폰 신부의 시복시성 운동이 본격화하면서 그에게 미국 군인들이 받는 최고 무공 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하자는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카폰 신부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았지만 명예훈장은 죽은 이들에게 추서하지 않는다는 논리에 번번이 좌절됐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카폰 신부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두 달 동안 1014km를 걸은 무어씨는 "누가 이 일을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리스도를 태운 당나귀`로 여길 따름이다"고 말했다.
위치토교구와 필센의 성 요한 네포머신본당은 카폰 신부 누리방(http://frkapaun.org/index. html)을 만들어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운동과 함께 명예훈장 추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