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다는 징표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후 첫 방문지로 이탈리아의 람페두사 섬을 선택했습니다. 람페두사섬은 아프리카에서 떠나온 난민들의 밀항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거기서 거리미사에서 교황은 강론을 통해 자본주의의 병폐를 거침없이 질책하며 인류의 양심이 깨어날 것을 거듭 촉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난민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징표를 보여주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말했습니다.
가톨릭 대사전에 따르면 징표(徵標)란 어떤 생각을 전달하거나 사물에 대한 견해를 밝힐 때 사용되는 기호나 상징을 말합니다. 표징으로도 설명됩니다. 교황은 당신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난민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연대의 상징으로 람페두사의 거리미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황께서 징표로 보여주신 거리미사가 지금 여기 한반도에들불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바로 평화와 생명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봉헌되고 있습니다.
성 골롬반외방선교회와 가톨릭기후행동 등은 강원도 삼척에서 삼척화력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생명과 평화의 거리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 미사에는 탈핵과 탈석탄을 통해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위기를 함께 연대해서 막아내자는 간절한 호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18일 ‘멸종반란 가톨릭’은 홍대 앞에서 기후정의 거리미사와 창조보존 십자가의 길을 봉헌했습니다. 미사에서는 제2제주공항을 비롯한 신공항 건설반대와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반대에 대한 기도가 바쳐졌습니다.
또 지난 1일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미사’가 일본 대사관 건너편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열렸습니다. 전국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남녀 수도회 장상연이 중심이 돼 봉헌된 미사를 통해 참석자들은 ‘위안부’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촉구했습니다. 미사 참석자와 세상 모든 이가 평화를 지키는 평화의 그루터기가 되자고 호소했습니다.
아울러 지난 20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전주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에 앞서 발표한 성명에서 사제단은 “윤석열 대통령의 3·1 기념사와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안이 일본 극우의 망언에 뒤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시국미사를 계속 이어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신부와 수도자만 소임지나 교구를 벗어나 기도하지 않습니다. 한국천주교회 주교들도 현장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최근 열린 한국천주교 춘계 주교회의에서 주교들은 자발적으로 분단 현장인 파주시 JSA성당이나 기후위기와 탈핵의 현장인 삼척화력발전소를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주교와 사제, 수도자 모두 성당 문을 열고 거리와 현장으로 달려가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의 궁핍을 덜어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교회헌장 8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고통을 우리 이웃의 고통을 통해 알아본다고 고백합니다. 성당에서든 거리에서든, 고통 받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사제의 눈> 제목은 <세상과 함께, 다시 거리미사>입니다. 그리스도의 현존과 끊임없는 사랑의 표징인 교회가 고통 받는 이들 곁에서 함께하며 복음을 널리 전하길 바라며 오늘도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