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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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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가야 한다….”

75세 노인이 천막 안에서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 “분명히 들었다 그분의 말씀을….” 노인은 며칠 전, 기도 중에 하늘에서 들려오는 ‘생생한’ 음성을 들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당장 짐을 싸라는 명령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인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을 때 내리는 형벌이 바로 그 사회로부터 추방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지금 아브라함에게 그 수치스럽고 막막한 ‘떠남’을 명령하고 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노인이 양 팔을 무릎에 짚고 일어섰다. 결심이 선 듯했다. 천막 입구에 드리운 휘장을 걷고, 밖으로 큰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그리고 아내와 조카를 비롯해 모든 종들을 불렀다.

“이제 떠난다. 먼 길을 가야 한다. 짐은 가능한 줄이고,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겨라. 나와 우리 모두의 앞길에 신께서 함께하실 것이다.”

유대인의 역사는 이렇게 4000년 전, 작은 한 부족을 이끌던 노인 아브라함이 아시아의 서쪽 끝, 유럽의 동쪽 끝에서 내린 ‘결단 하나’에서부터 시작한다. 노구(老軀)를 이끌고 미지의 땅으로 향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그렇게 유대인 아브라함은 모든 신앙 백성의 맨 앞줄에 우뚝 섰다.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한민족(韓民族)의 맨 앞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다면, 유대 민족의 맨 앞줄에는 아브라함이 있다. 2021년이 단기 4354년이니까 유대민족과 한민족의 역사는 비슷한 시기에 출발하는 셈이다. 출발한 시기도 비슷하지만, 살아 온 모습도 닮은 꼴이다. 두 민족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수많은 침략을 받았고, 이민족의 지배도 받아야 했다. 자녀에 대한 교육열,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열정 또한 닮은 꼴이다. 또 고난의 역사 탓인지 ‘우리끼리’ 똘똘 뭉치는 남다른 민족의식도 빼놓을 수 없다.

다른 민족에게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풍부한 종교적 영성적 성향도 비슷하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고난이 닥치면 장독 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 두 손 비비며 천지신명께 빌었고, 유대 어머니들도 유일신의 약속을 믿고 늘 기도했다. 이렇게 한국인과 유대인은 태어나면서부터 풍부한 종교적 감수성을 가지고 나온다. 특히 단군신화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민족과 한민족의 출발점에는 ‘하늘’에 대한 특별한 공경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유대인은 한국인과 많은 것에서 닮은 꼴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유대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알고 있다고 해도 탈무드, 키부츠, 밥상머리 교육 등 파편적 지식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중적 인식이 심층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겉돌고 있다. 구약성경 이야기를 지금 쓰는 이유다.

신약만 중요시하는 이들이 있다. 잘못이다. 구약을 알아야 신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온통 나자렛 예수가 구약성경에 예고된 약속을 성취한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구약이 없다면 신약은 해독할 수 없는 책, 뿌리가 없어 말라 죽게 될 식물과 같은 것이다.

끊임없이 배반하고 돌아서는 유대인들을 향한 유일신의 ‘새 계약’(예레 31,31-34 참조)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유일신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3)

그 ‘약속의 역사’로 이제 긴 여행을 떠나려 한다.
“먼 길을 가야 한다….”
 

글 _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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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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