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성지 순례 1부
성지순례일 : 2020年 7月 4日
진무영순교성지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1(관청리 643) 강화성당 내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부터 깊은 연관이 있는 곳입니다.
1795년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가 철종의 조모 송씨(은언군의 처)와 며느리 신씨에게 세례를 주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때 처형을 당해 순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강화도에 유배되어 살고 있던 은언군(철종의 조부)도 이 이유로 강화부(현재 강화성당 부근)에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또한 1839년 기해박해를 겪으면서 육로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어 선교사 입국 등 천주교의 육로 유입이 어려워지자 해로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강화도와 황해도 뱃길이 매우 중요한 천주교 유입의 경로가 됩니다.
하지만 1866년 병인양요 이후 외국 선박이 빈번하게 나타나면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게되고 쇄국정책을 펼치던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를 더욱 박해하게 됩니다.
강화도는 수도방어의 요충지이자 외세와의 충돌현장이기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지게 됩니다.
이곳 진무영은 1700년부터 해상방어를 위해 설치된 군영이었고 동시에 천주교 신자의 처형지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그로 인해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새남터와 서소문밖에서 처형하던 천주교 신자들을 양화진에서 처형하게 됩니다. 양화진이 지금의 절두산성지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 진무영에서도 천주교신자들이 처형되게 됩니다.
1868년 5월 22일 장치선(장주기 성인의 조카), 최영준 요한(애오개 회장, 최인서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짐),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등이 이곳 진무영에서 순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