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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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성월에 만난 사람]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 조광 교수

“신앙 선조 삶 되살릴 때 순교영성 되살아나”/ 신앙과 삶 유리되는 모습이 순교영성의 변질/ 삶의 현장에 복음 선포하고 성지로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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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 교수

“시쳇말로 ‘서교(천주교) 책 한 번 보면 미쳐버린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을 지녔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서 가르친 천주교 교리의 매혹적 측면과 정당성을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조선 후기 순교자들의 삶을 되뇌는 (재)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 조광(67·이냐시오) 교수의 말에는 떨림이 실려 있었다. 신앙 선조들의 삶을 입에 올리는 순간 마치 순교 현장에 서있는 듯 비장함이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순교는 결코 광신이 아닙니다. 이성적 판단과 현실 사회에 대한 진전된 인식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순교자성월을 맞아 휴일 아침 서울 삼일대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에서 만난 조 교수의 입에서는 인터뷰 내내 ‘각성’, ‘인식’이라는 말이 셀 수 없이 나왔다. 순교가 무지렁이 천민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을 제대로 인식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각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하는 조 교수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민족사학계의 대표 학자로 꼽히며 조선 후기 근대사 연구에 평생을 매달려오다시피 한 조 교수는 지난 2010년 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정년퇴임한 후에도 어김없이 연구실로 출근하고 있었다. 오히려 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있던 연구공간이 서너 배 더 늘어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 초 위촉된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이라는 직함에서부터 연세대 용재 석좌교수, 고려대 명예교수, (사)한국고전문화연구원장 등 현재 지니고 있는 굵직굵직한 몇 개의 직함만으로도 그가 한국사학계와 교회사 연구분야에서 쌓아온 성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간 수없이 지녀온 직함 가운데 가장 애정이 가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교수라는 직함이지요. 공부하고 학생들과 토론하고 가르치고, 또 그들로부터 자극을 받아 다시 생각하고…, 평생 보람을 가졌던 일입니다.”

잠시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는 듯하던 조 교수는 지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한국 측 위원장을 지내며 한일관계사 재정립에 힘을 쏟았던 일을 떠올리며 교회사의 위상에 대한 강조도 잊지 않았다.

“한국교회사 자체를 교회에 속하는 역사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한국 사회 역사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와의 관계성 안에서 교회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는 조 교수는 실제 자신의 삶 또한 그렇게 걸어왔다. 가톨릭대학교 신학생이었던 그는 재학 시절 교회사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회장을 지내고, 교회사 연구지를 내기도 했다. 대신학교 4년을 마치고 1969년 고려대 사학과에 편입학한 뒤로 무엇인가에 이끌려 조선 후기사 연구에 평생을 바쳐오고 있다.

“신자 입장에서 교회사에 대한 정리가 제대로 안 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유리돼 있던 한국사와 한국교회사 연구에 일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오늘에까지 이르게 한 것 같습니다.”

사제가 되기 위한 길에서 사학자의 길로 걸음을 옮긴 조 교수는 별 티도 나지 않고 제대로 평가받기도 힘든 교회사 연구에 매달렸다. 그 결과 40편이 넘는 천주교회사 관련 논문을 집필했으며, 정년퇴임하면서는 한꺼번에 8권에 이르는 역저를 펴내기도 했다.

1964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창설될 당시 초대 소장이었던 고(故) 최석우 몬시뇰을 돕던 신학생 신분의 조 교수가 한국교회와 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전 교회 차원에서 한국 천주교 200주년(1984년) 행사를 준비하던 1980년 무렵이었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갖게 준비하기 위해서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1981년) 행사부터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 쇄신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95년은 조 교수에게 있어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에 새로운 화인을 새긴 해로 기억된다.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해방 50주년을 맞아 교회가 민족을 위해 할 일을 모색하던 차에 민족통일과 관련된 조직을 만들어야겠다는 구상을 밝혔던 것이다. 김 추기경의 뜻을 받아 조직 구성 작업에 함께하게 된 조 교수는 지금은 보편화돼 일반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는 ‘민족화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들고 나왔다.

“통일이라는 말은 우리 민족에게 지고지선이지만 역사 과정을 통해 너무나 많이 오염돼 이를 대체할 말로 생각해낸 개념이 ‘민족화해’였습니다.”

남과 북이 다 간절히 통일을 바라고 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형제에게 총부리를 겨눈 전쟁을 낳아 남북 분단을 더욱 고착시키고 많은 이를 불행에 빠뜨리게 했다는 역사학자로서의 인식이 그 같은 판단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민족화해’ 개념을 제시했던 당시만 하더라도 반대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조직을 함께 준비하던 이들은 물론이고, 1995년 미국 뉴욕에서 만나게 된 조선가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 장재언(사무엘) 위원장 등 북측 인사들도 “왜 통일이라는 좋은 말을 놔두고 흐리멍덩한 말을 쓰느냐”고 비판할 정도였다.

“아무리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수단과 방법이 올바르지 않으면 목적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적 윤리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입장에서 당시 통일이라는 말은 상당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 교수는 민족화해 개념에 대한 신학화·이론화 작업이 제대로 이뤄질 때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 더 많은 기여를 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한국교회사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그 역사의 현장 속에서 여전히 들숨과 날숨을 함께하고 있는 조 교수는 “교회사는 주교나 신부 등 성직자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모든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역사임”을 몇 번이나 힘주어 말했다. 그의 연구 도정에서 한글을 쓰는 민중의 발견은 성직자 중심으로 치우쳐 있던 교회사 연구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결실이기도 했다.

“당시 천주교는 한글을 쓰던 민인(민중)들의 교회였습니다. 민인들이 가진 건강한 역사의식과 그들이 죽음을 불사해가며 지향했던 올바른 태도의 결합이 이뤄져 순교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 교수는 천주교가 당대에 가장 적합성을 지닌 종교였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그 시대에 맞는 종교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주역 괘사(卦辭)에 나오는 ‘군자이치명수덕’(君子以致命修德)이라는 말로 순교자들의 삶을 설명했다.

“순교자들이 걸어간 ‘치명’(致命)의 길은 지배층이 덕에 이르기 위한 길이었음을 볼 때, 치명은 신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바로 군자’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한 용어였습니다.”

한마디로 ‘천주’(天主)라고 하는 존재가 모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인식을 가져다주었고, 나아가 순교



가톨릭신문  2011-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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