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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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르포] ‘희망을 펑펑 부풀려드립니다 - 제주민속오일장’

세월의 흔적 묻어나는 삶의 현장에서/ 지역민들과 희망·정 나누며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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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장날이네.’ 이 한마디는 이웃집 누구누구를 보고 싶다는 말, 살림살이 무엇무엇이 궁금하다는 말, 놀이판 구경하며 잠시 쉬고 싶다는 싶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한국 고유의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것 뿐 아니라 온갖 세상살이 나눔들이 오가는 곳, 세월의 냄새 그득히 묻어나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었다.

최근 전국 각 지역마다 고유의 민속장터가 새로운 활기를 얻고 있다. 특히 제주민속오일장은 조선말 보부상들의 발걸음에서 시작돼, 현재 평일엔 1만여 명, 휴일엔 2만여 명 이상의 나들이객이 찾아드는 제주도 최대 규모의 오일장이다. 서옥필(로렌조·61·제주 동광본당)·신경례(루치아·59)씨 부부의 ‘뻥튀기’ 트럭은 이곳에서 17년여째 장터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작은 배려와 나눔으로 큰 희망을 피우는 우리네 이웃의 삶을 통해, 새해 새 날의 문을 열어나갈 힘을 채워본다.



■ 희망을 부풀려드립니다

“뻥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냉큼 귀를 막지만, 설레는 표정을 감추긴 어렵다. 장터에서 ‘뻥튀기’의 바삭바삭한 식감과 구수한 풍미를 맛보지 못하면 그야말로 섭섭한 일. 잘 말린 누룽지며 쌀, 옥수수, 콩 등 온갖 곡식들이 불에 달궈진 틀에서 뻥뻥 튀겨져 나올 때마다 너도나도 웃음보를 터트린다. 이젠 사람 손대신 기계로 틀을 돌리고, 장작 대신 가스 불을 이용해 곡식을 튀겨내지만 ‘뻥튀기’의 정겨움만큼은 변함이 없다. 구수한 주전부리를 피우겠다고(튀기거나 볶는다는 의미로 사용) 나선 할망(할머니)들의 이야기꽃은 장날 더욱 활짝 피어난다.

제주민속오일장 후문에 해당하는 입구 쪽으로 들어서면, 서옥필·신경례씨 부부가 ‘뻥튀기’를 팔고 있는 트럭 점포를 만날 수 있다. 손님들은 이곳에서 주전부리 뻥튀기를 사들고 장 나들이를 시작하곤 한다. 오가는 주민들도 심심찮게 멈춰서 차 한 잔을 나누며 갖가지 안부도 전하는 쉼터로 자리 잡았다.

부부는 지난 1991년부터 과자 노점을 열었다. 서씨가 병을 얻어 일자리를 놓치자 어쩔 수 없이 시도한 일이어서 창피한 마음도 컸다. 하지만 과자 장사는 부부가 살아가는 기쁨을 몇 배나 부풀려줬다. 장사를 하게 되면서 부부는 함께 임종자를 돌보는 봉사활동에도 더욱 열심히 나설 수 있었다. 특히 신씨는 성가대 활동과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에 마음껏 시간을 쓸 수 있어 더욱 기쁘게 생활한다고. “뻥튀기는 다 팔지 않고 늘 남기려고 애쓴답니다. 그래야 장애인 시설에도 가져다주고,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쉼터에도 보낼 수 있거든요.”

서씨도 한 푼 더 벌려고 아옹다옹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삶을 지탱하는 큰 힘이라고 말한다.

온종일 수많은 손님들이 같은 질문을 던져도 부부는 처음 맞이하는 손님을 대하듯 웃으며 대답한다. 몇 시간 함께 있던 기자가 지치지 않느냐고 묻자 신씨는 “사실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는 가식적인 친절도 보였었다”며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인이고, 손님들이 돈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과 정을 나누는 이웃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늘 웃게 된다”고 말한다. 부부는 틈만 나면 손님들에게 성당을 다니는지 묻고 입교를 권하기도 한다. 자신들이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성당에 가자고 권할 때가 가장 뿌듯하기 때문이란다.

부부의 안내로 넓디넓은 장터를 좀 더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 혼저옵서예

해가 얼굴을 내밀기 한참 전, 어둑한 새벽부터 상인들의 움직임은 분주하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장터에는 제주도 땅이 내어주는 넉넉한 먹거리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출출한 배를 달래줄 국밥과 국수도 모락모락 김을 내며 끓어오른다. 농·수산물전에 이어 옹기전, 약재전, 가축전, 각종 잡화점, 이젠 쉽사리 볼 수 없는 전통 대장간까지 앞 다퉈 문을 연다.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장터다. 65세 이상 할머니들만이 난전을 펼칠 수 있는 ‘할망장터’는 더욱 일찍 깨어났다. 부지런히 집을 나선 주민들의 발걸음이 도착하자, 할망들의 입에선 육지 사람들은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제주방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배추 한 포기만 골라도 감귤 네댓 개가 따라온다. 제주 장터 인심은 육지 어느 시장보다 넉넉하다.

“이거 얼마우꽈? 얼마마심?”(가격이 어떻게 되나요?)

굳이 살 것이 없어도 할망 앞에 같이 쪼그리고 앉아 이것저것 흥정을 거는 이들도 많다. 대형마트에선 과일 한 알 집어 올릴 때마다 그램 수를 따지고 값을 계산하지만, 장터에선 한 움큼씩 한 바구니씩 덥석덥석 집어 올려도 부담이 없다. 게다가 새해맞이 덤이라며 집어주는 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다.

시장을 한 바퀴 겨우 돌아봤을 뿐인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장터 곳곳에서 만난 신자 상인들은 “부족한 것도 많지만 조금이라도 서로 나누는 인심들이 늘어 가면 새해는 더욱 희망찬 시간이 되지 않겠느냐”고 입을 모았다.

“새해 복 하양 받읍소~!”

서로를 격려하는 인사를 전하고 장터를 나서는 이들마다, 커다랗게 부푼 희망을 안고 돌아가는 모습이다.


 
▲ 서옥필·신경례씨 부부는 민속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뻥튀기’를 만들어판다.
정을 듬뿍 담고, 희망의 메시지를 실어 주는 덤이 더 큰 ‘뻥튀기’ 과자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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