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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는 실로 지칠 줄 모르는 여행가다.
53년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세 번째 전도여행길에 올랐다. 두 번에 걸친 전도여행 중에 이방인의 땅 여기저기서 그토록 고난을 겪고, 필리피에서는 심지어 매질까지 당했는데도 다시 서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21세기 잣대로 40~50년대 바오로의 여행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당시 소아시아 내륙지방은 대부분 걸어서 이동했다. 탈 것이라야 상인들의 화물운반용 마차가 고작이었다. 수송용 말은 병사와 정부 관리들 전유물이기에 일반인은 쳐다볼 수도 없었다.
물론 배가 있었다. 하지만 해로(海路)도 만만한 여행길은 아니었다. 바다에서 파선(破船)을 당한 것만 3번이다. 그는 여행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던지 코린토 신자들에게 작정을 한듯 조난 경험을 토로했다.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2코린 11,23-28)
그런데도 길을 나섰다. 예루살렘에서 싹튼 복음을 세계의 심장부 로마는 물론 미지의 세계인 로마제국 너머까지 옮겨 나르려는 원대한 포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전도여행은 바오로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오랜 세월 감추어 두었던 신비의 계시`(로마 16,25)에 의한 것이다.
# 세계적 도시 에페소를 거점으로 3차 전도여행에서 주목해야 할 도시는 터키 수도 이스탄불에서 남서쪽 600㎞ 거리에 있는 에페소다. 그가 27개월 동안 머물면서 이곳을 선교본부 삼아 가장 중요한 활동 시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로마 영토에 속한 에페소는 아시아 속주에서 으뜸가는 도시였다. 깊은 만의 모서리에 항구가 있어 일찍부터 상업과 학문이 번창했다. 특히 그리스인들이 `아르테미스`라고 부르는 어머니 신의 신전이 있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축된 거대한 신전은 화재 이후 재건되었는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혔다. 이 도시에는 신전을 찾는 순례자들이 연일 붐볐다. 인구는 약 20만 명이었다.
`뛰어난 지략가` 바오로가 이 같은 세계적 도시를 선교거점으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그가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상인과 순례자들 사이에서 회자되어 퍼져나가길 기대한 것이다.
바오로가 이 도시에 도착하기 전, 아폴로라는 유다인이 이미 회당에 드나들며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폴로는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터라 코린토에 건너가서도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했다. 아폴로의 활동은 바오로가 씨를 뿌린 밭에 물을 주는 격이었다. 그래서 바오로는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1코린 3,6)라고 말했다.
바오로는 요한의 세례 밖에 모르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이후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나날이 성장했다. 특히 그의 치유 은사가 소문을 타고 퍼져 나갔다. 마술을 부리던 사람들이 회개해서 자신들의 책을 불살라 버렸을 정도다. 바오로는 "문이 활짝 열려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걸림돌도 많았다. 회당의 유다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얘기에 역정을 냈다. 예수 그리스도를 도무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에페소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아르테미스 신당 모형을 팔아 돈을 버는 은장이들이 바오로 동료들을 붙잡아 고발한 것이다. 바오로가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를 미신으로 몰아세우는 바람에 수입이 줄자 집단 반발한 것이다. 사도행전 저자 루카는 우상숭배를 정복한 그리스도교를 보여주기 위해 이 소동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 바오로를 괴롭힌 `적수들`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코린토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즉 에페소를 거점으로 마케도니아, 갈라티아, 아카이아 지방에 설립된 교회들을 보살폈음을 알 수 있다. 그 교회의 신자들은 바오로를 찾아와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주며 충고를 들었을 것이다.

▲ 바오로는 세 번째 전도여행이 끝나갈 무렵 밀레토스에서 에페소 교회 원로들과 눈물의 작별인사를 한다.
원로들은 사도를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사도 20,37)
그림은 성바오로대성당 내부 프레스코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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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바오로와 코린토 교회의 관계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활기차고 믿음직스럽던 코린토 교회에 분열이 일어났다. 바오로는 어떤 선교사들이 코린토에 나타나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반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코린토 교회로 달려갔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갈라티아에서도 나쁜 소식이 도착했다. 그곳에도 바오로를 반대하는 선동꾼이 침투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고, 바오로의 권위를 문제삼고 있었다. 바오로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괴로웠다. 코린토서, 갈라티아서, 필리피서 등은 모두 이런 긴급한 사안들에 대한 답변이다.
`어떤 선교사`와 `선동꾼`은 바오로가 말하는 소위 `적수들`이다.
적수라고 하면 우선 "주 예수님을 죽이고 예언자들도 죽였으며, 우리까지 박해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이고 모든 사람을 적대하는 자들로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