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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신심은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적 신심으로 뿌리내려 왔다.
사진은 1954년 10월 8일에 거행된 성모성년 축하 행사 장면으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신자들이 성모상을 앞세우고 행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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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이 해방된 8월 15일은 바로 `성모승천대축일`이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민족의 해방을 성모 마리아의 선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신자들 사이에 성모신심은 더 확산됐는데 특히 반공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공산주의자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파티마의 성모께 대한 신심`이 급속도로 퍼졌다. 광복절과 성모승천대축일을 맞아 한국 천주교회의 남다른 성모 신심을 살펴본다.
한국 천주교는 교회 창설 초기부터 성모 마리아 공경을 통한 신심 함양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초기 신자들은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경직해광익」 「주교요지」 등을 통해 성모 마리아께 대한 이해와 공경을 키웠다.
박해 당시 조정에서 천주교인들로부터 압수한 물품 목록을 작성한 「사학징의」를 보면 많은 신자들이 묵주와 성모 상본을 지닌 채 체포됐다고 기록돼 있다. 그래서 조정에선 압수한 성모상과 묵주를 통행이 잦은 성문 입구 바닥에 놓아두고 이것을 밟고 지나가면 천주교인이 아니거나 배교자가 되는 것으로 보았고, 밟지 않고 지나가면 신자이니 즉석에서 참수하라고 지시해 시행한 적이 있었다.
이처럼 박해기 때의 성모신심은 신자 개개인에게 강한 정체성을 심어줬다. 그 증거로 순교자들은 처형당하기 직전까지 성모 마리아께 기도했다. 이도기(바오로)는 순교 직전 하늘을 우러러보며 "아베 마리아"를 외쳤고, 김광옥은 순교 직전까지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다.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의 영성에도 성모 신심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두 사제는 편지를 쓸 때면 성모께 기도를 청하고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바라는 내용으로 끝맺었다.
▲한국교회 수호 성인으로
한국 천주교의 성모신심은 19세기 중엽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 확산됐다. 이들 선교사들은 당시 프랑스에서 널리 확산된 성모신심, 성모 공경 전통을 한국 교회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제2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한국 신자들의 성모신심을 칭송해 1838년 교황청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한국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청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41년 8월 22일 이를 허락했다.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6년 11월 2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원죄없으신 성모 성심회`를 설립, 신자들의 성모신심 운동을 체계화ㆍ조직화했다. 성모성심회 회원들은 매주 정기 모임에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기도를 많이 바쳤다.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천주성교공과」를 번역, 출간해 신자들의 성모신심을 더 고양시켰다. 이 기도서는 일상기도와 주일, 전례주년 내 성모축일에 바치는 기도문들을 수록해 놓은 것으로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전례 성모신심의 기도서이자 지도서 역할을 했다.
베르뇌 주교는 또 선교사들의 사목구를 배정하면서 각 사목구에 성모 축일 명칭을 붙여 신자들의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과 덕행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혔다.
▲다양한 사도직 활동 활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1898년 명동성당을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했고,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교리 선포 100주년이 되던 1954년에는 한국교회가 다시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는 등 성모 마리아와 관계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계속 이어졌다.
1950년 전후로 레지오 마리애, 파티마의 성모사도직(푸른군대), 성모의 기사회 등 성모 신심 운동 및 사도직 활동이 도입됐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는 올바른 성모 신심의 육성을 위해 다양한 지침을 공포하고 성모 신심의 생활화를 지도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