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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혼살림 재미가 쏠쏠한 김서라씨가 한빛 새터민 정착지원센터 정착도우미 담당 이금안 사회복지사와 함께 컴퓨터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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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빛종합사회복지관 가족들과 봉사자들이 김장하기 위해 파를 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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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북서풍이 낮게 깔려 불어대는 골목길에서 차를 내렸다. 스산한 겨울 풍경에, 늦은 가을까지 피던 노란 국화와 따스한 커피 한 잔이 새삼 그립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 새터민만 1300여 명이나 모여사는 양천구에서도 이들이 가장 많이 몰려 사는 지역이다. 그래선지 신월4동 `한빛종합사회복지관`(관장 정성환 신부)은 새터민 사도직활동이 아주 활발하다.
2006년 4월 `새터민 정착지원센터`를 개소하기 전에도 새터민 정착도우미 제도를 도입, 다양한 사업을 전개해 왔다. 지금도 `나눔과 섬김의 사랑 공동체`를 지향하며 정착도우미 제도와 함께 새터민 사례 관리, 사회적응 및 고용지원, 아동ㆍ청소년 학습지원, 컴퓨터 교육, 건강지원사업을 펼친다.
11월 21일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와 빈민사목위원회가 새터민 통합사목을 전개하고자 마련한 `양천 평화의 집`과 연대해 새터민 사도직에 팔을 걷어붙인다. `새터민 공동체`를 꿈꾸는 양천 평화의 집은 민족화해와 일치 사도직과 빈민사목을 결합한 실험적 시도여서 특히 눈길이 간다.
`새터민 정착 도우미`제도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특히 궁금했다. 그래서 새터민 정착도우미 담당 이금안(마리아 아욱실리아, 50) 사회복지사와 함께 한파를 뚫고 새터민들 가정을 찾아나섰다.
#프롤로그-새터민들 팍팍한 현실로 뛰어들다
복지관에서 걸어서 20분쯤 걸리는 임대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런데 출입구가 미로처럼 얽혀 겨우 엘리베이터를 찾아 11층으로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르니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나온다. 장철근(68)ㆍ이은옥(66) 어르신 부부다.
거동이 불편한 듯 할머니는 문칸방에서 힘겹게 나온다. 33.05㎡(10평) 남짓해 보이는 집안을 둘러보니 살림이 단출하다. `추억에 기대어 사는` 방 두 칸엔 긴 소파가 침대 대용으로 놓여 있고 낡은 브라운관 TV와 소형 냉장고, 고만고만한 몇몇 가재도구가 눈에 띌 뿐이다. 대부분 복지관이나 정착도우미들이 가져다 준 물건이란다. 녹록지 만은 않았을 힘겨운 삶의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할아버지가 모처럼 손님이 왔다고 귤 한 개와 떡, 과자봉지를 꺼내온다. 할아버지가 "귤이 한 개밖에 없다"며 다시 가져가려 하기에 빼앗다시피 받아들고 "맛있게 먹겠습니다"고 너스레를 떨며 쪼개 넷이서 나눴다.
함남 함흥 태생인 부부는 종교적 이유로 탈북했다. 둘 다 연길 출신으로 연길에서 살던 할머니는 특히 증조부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독실한 개신교인인데도 1960년대에 북한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북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기도를 해주고 하느님을 찾다가" 노동교화소에 끌려가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보여주지도 않았던 상처를 할머니는 부끄러워하며 보여줬다. 얼굴과 다리, 몸 곳곳에 난 상처는 아물었는데도 흉칙하다. 할아버지는 이내 눈을 돌린다.
북에서 전기 공정사(기술자)를 지낸 할아버지는 할머니 때문에 부부가 같이 농촌에 추방됐다가 1998년 7월 탈북, 연변에서 10년 가까이 숨어 살았다. 그러나 중국 국적이 없어 불안한 마음에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2007년 11월 국내에 들어왔다. 요즘은 새터민들이 주로 다니는 새평양순복음교회에 다니며 마음껏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랑했다. 취업 걱정은 없다. 북에선 워낙 힘들게 살았기에 한국에선 정부 지원만으로도 살기가 넉넉해서다.
#주홍글씨와도 같은 `탈북 난민`
"북한에서 살지 여기는 뭣 하러 왔냐?", "우리가 낸 세금으로 왜 당신들을 먹여 살려야 하느냐?"….
장 할아버지의 집을 나서다가 얼마 전 새터민들을 취재할 때 들은 말이 떠올랐다. 얼마나 큰 상처가 됐을까 싶어 가슴 한 켠이 시려 온다.
그런데, 김서라(34, 가명)씨 아파트에 들어서니 딴판이다. 몇 달간 연애를 거쳐 지난 10월 26일 혼인했다는 그의 집은 깨소금 냄새가 나는 듯하다. 신혼살림답게 꽃무늬 벽지에 새 가전도구로 가득하고, 컴퓨터 바탕화면엔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깔았다. 여간 행복해 보이는 게 아니다.
그러나 1998년 배가 고파 돈을 벌기 위해 탈북했을 때만해도 그는 고통스러웠다.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쪽 청진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다시 중국으로 나와선 조선족과 억지로 혼인해 아이를 두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 그는 목숨을 걸고 탈북 행렬에 가담했다. 중국 남부 윈난(雲南)성과 태국을 거쳐 국내에 들어온 게 지난해 8월이다. 하나원을 나와 정착한 지 1년 남짓한 세월에 안 해본 일이 없다. 갈비집과 중국집 등 식당 아르바이트는 물론 회사도 다녀봤다. 다른 새터민 여성들이 멋 내고 놀러 다닐 때도 그는 악착같이 일했다. 그래서 다른 새터민들은 곧잘 빠진다는 우울증도 비켜 갔다. 그런데도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금 신랑을 만나 재혼에 성공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원에서 배운 건 실제 삶에 도움이 되질 않았어요. 모르는 게 너무 많았어요. 뭘 하려면 겁부터 났어요. 그런데다 북에 두고온 가족도 생각나고, 중국에 사는 아이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어요. 하지만 이제 재혼하고 나니 정말 행복해요. 기회가 닿는다면 꼭 직업교육을 받고 일을 하고 싶어요."
#에필로그-그럼에도 꿈을 말하다
무겁고도 기꺼운 마음을 안고 세 번째 새터민 가정을 찾았다. 동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