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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깎고 깎아 주님 모습 빚어내리

봉헌생활의 날-천주 섭리 수녀회 성소담당 진영주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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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봉헌생활을 하는 모든 수도자들이 봉헌생활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에 합당한 삶을 격려하는 봉헌생활의 날이다. 평범한 성소담당 수녀를 통해 봉헌생활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1월 16일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천주 섭리 수녀회 본원에서 눈처럼 하얀 미소를 짓는 진영주(안나) 수녀를 만났다.




 
▲ 천주 섭리 수녀회 진영주 수녀에게 봉헌생활이란 하느님이 주신 모습대로 일상 안에 잔잔히 존재하는 삶이다.
그는 수녀원 뜰에 있는 소나무처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언제나 푸르다.
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
 



대학생 시절 냉철했던 마음에 녹아든 복음
서원 앞둔 현장실습 중 어려움 등 시련 거쳐
봉헌생활, 내 안에 하느님을 살게 하는 것



# "네가 수녀원을 간다고?"

   그가 입회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며 말했다.
 "영주야, 시집을 가면 한 명의 시어머니를 모시면 되지만, 수녀원에 가면 몇 명의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지 아니?"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의 형제들도 "어차피 3개월 안에 돌아올테니 보내주라"고 거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활발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운동권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루탄 가스 속에서 분신자살을 하는 선배들을 보며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학교 4학년 시절, 그런 고민을 안고 성서공부를 시작했고 복음은 마음에 녹아들어갔다. 냉철했던 그에게 복음은 따뜻하고 기쁜소식이었다.
 그는 친구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무척 엄했던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 수녀가 됐다는 소식. 그는 믿을 수 없다며 친구와 함께 확인하러 수녀원을 찾아갔다.
 수도복 속의 선생님은 놀라웠다. "선생님, 행복하세요? 좋아요?" 선생님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
 돌아오는 길, 이들은 "별난체험을 했다"며 "우리 혹 잘못돼서 수녀원에 오게 되면 여기에 들어오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1년 후 이들은 나란히 이 수녀회에 입회했다.

# 첫 서원 전까지 보따리는 세 번 싸야 한다는데

 1994년. 수녀원의 첫 날 밤. 그는 침대 머리맡에 올려진 밤송이 두 알을 보고 까무러치게 놀랐다. 선배 수녀들이 장난으로 올려놓은 밤송이는 봉헌생활의 가시밭길을 상징했다.
 "야, 오늘 진짜 외롭다. 예수님을 따르는 건 좋은데, 함께 따르는 이들과 마음 맞추는 게 힘들어…."
 봉헌생활을 시작하며 동기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던 그는 틈만 나면 수녀원 뜰에 있는 개에게 말을 걸곤 했다.
 그러나 그에게 진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서원을 앞둔 현장실습 기간, 진 수녀는 요양원으로 파견됐다. 임종을 앞둔 치매 환자들을 돕는 소임이 내려졌다.
 치매 어르신들이 어질러놓은 대변을 치우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진 수녀는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주방에서 커피를 마신 후 일을 시작했다. 일을 더 잘해내기 위한 준비였다. 그러나 책임자는 매일 진 수녀가 주방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만 봤고, 그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본원으로 돌아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안나 수녀님, 주방에서 오로지 감자만 깎으면서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살라면 살 수 있겠어요?"
 진 수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꺽꺽 소리를 내며 울었다. 영혼이 아프다고 우는 소리였다.

# 소나무처럼 잔잔히 존재하는 삶

 기도하며 살아온 시간은 철저히 과거로만 느껴졌다. 실습을 마치지 못했다는 큰 상처는 봉헌생활의 의미를 다시 묵상하게 했다.
 `하느님은 기쁨을 주시는 분이지, 감자를 깎으라고 하실 분일까?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데. 예수님 눈에 일의 귀천이 있을까?`
 예수님 눈에는 모든 일이 의미있고, 필요한 자리에 우리를 놓으시는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고쳐졌다. `그래, 깎지 뭐!`
 예수님만 바라보며 감자를 깎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자체로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그의 마음 안에 예수님이 사시기 때문이리라. 봉헌생활이란, 내 안에 예수님이 살게 하시는 것이었다.
 대학생 시절, 토론과 비판에 익숙했던 그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는 말씀은 그를 하느님께로 이끌었다. 그는 `길이면 가야지, 진리? 따라야지, 생명이라고? 내가 붙들어야 살 수 있는 거잖아…`라고 생각했고, 16년 동안 묵묵히 그 길을 걸어왔다.
 진 수녀는 4년째 성소담당을 맡고 있다. 영적 목마름을 갈구하면서도 선뜻 봉헌생활에 나서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어머니같은 마음이 된다. 더 토닥여주고 싶어진다. 때론 수녀원 밖에서 기다리는 성소자의 남자친구에게도 손을 흔들어줘야 하지만, 그는 성소담당은 `젊은이들의 길동무가 되어주는 것이지…`하며 마음을 달랜다. 그래도 젊은이들을 봉헌생활에 초대하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사춘기 소녀처럼, 그의 지나온 봉헌생활은 아프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 그러나 아프고 깨질 때마다 그는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고, 그의 영혼은 더 자유로워졌다.
 그가 살아온 봉헌생활의 일기장을 들춰보니, 20대에는 기쁘고 재밌는 것에 마음이 움직였다. 30대에는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간이었다. 지금은 일상 안에 잔잔히 존재하는 수도자로 살아간다.
 진 수녀는 "내가 이 곳에 있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섭리"라며 "어제도 마련해주셨고, 오늘도 마련해주고 계시고, 앞으로도 마련해주실 것을 믿기에 두려움 없이 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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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9-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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