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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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의 달에 만난사람] 에콰도르에서 30년간 활동하고 있는 평신도선교사 김용숙 엘리사벳씨

머나먼 남미 선교 텃밭 일군 아름다운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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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전 광주대교구에서`사도직 협조자` 성소를 살던 30살 처녀가 라틴 아메리카 에콰도르로 떠났다. 30년을 에콰도르 과야킬 교구에서 선교사로 살았다. 60살 할머니가 돼 돌아왔다. 30년 만에 긴(?) 휴식을 얻었다. 김용숙(엘리사벳)씨. 13일 광주대교구 운암동성당에서 그를 만났다.


에콰도르와 인연

김씨가 에콰도르에 간 날은 1979년 12월 3일이었다. 프랑스 루르드 성모성지에 있는 `사도직 협조자 국제 양성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며 잠시 지내던 그는 같은 협조자 회원인 오스트리아인 자매에게서 에콰도르에 관한 얘기를 자주 들었다. 그 자매 동생이 에콰도르 과야킬 교구에서 선교사제로 있었던 것이다.
 "마침 교회의 신비에 관한 강의를 듣고 있었어요. 모두가 같은 가톨릭 공동체인데 에콰도르 사정이 그렇다면 가서 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과야킬교구 솔리트레 본당. 막상 가서 보니 모든 게 충격적이었다.
 "마실 물이 없었어요. 강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지요. 강물을 길어 하루쯤 놔뒀다가 맑은 물만 떠서 끓여 먹었어요. 저는 그렇게 끓여 먹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그냥 마시는 경우도 많아요."
 화장실도 문제였다. 재래식 화장실인데 화장실 한쪽에서 샤워도 했다. 물론 마실 물도 변변찮은 상황에 씻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기생충과 모기로 인한 고통도 엄청났다. 오후 3~4시가 되면 아예 모기장 속에서 살아야 했다. 모두들 신자라고 하는데 강도도 많았고 부정부패도 심했다. 도덕 관념도 별로 없는 데다 가정은 일부다처가 많았다.
 그렇지만 주민들은 순박했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했지만 마음이 열려 있었다. 동양에서 온 낯선 이방인을 친절하게 대해 줬다.

신자교육에 매진
 제주도 만한 넓이에 4만 명이나 되는 신자를 본당신부 혼자 사목하고 있어서 김씨는 본당신부를 도와 신자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언어가 서툴렀다. 신자들도 공부에 익숙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울려 지내면서 같이 기도하고 노래하고 하는 일은 쉽게 적응이 됐어요. 제가 여성이어서 주민들과도 훨씬 더 쉽게 친해질 수가 있었지요."
 현지 생활에 조금씩 적응이 되면서 김씨는 첫영성체 교리와 청소년 교리 등을 맡아 해나갔다. 그러면서 가난한 주민들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재봉틀을 2대 마련, 양장점을 시작했다. 양장점은 규모가 커져 재봉틀이 9대로 늘었다.
 "이렇게 5년이 조금 지나니까 혀가 풀리는 것 같았어요. 그러던 차에 이웃 페드로 카르보 본당 신부 초청으로 그곳으로 옮기게 됐습니다."
 과야킬에서 70km쯤 떨어진 페드로 카르보 본당에서 김씨는 다른 4명의 사목위원과 함께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지역이 넓으니까 예전에 스페인 선교사들이 큰 마을(공소)에는 수호성인을 정해줬지요. 그 수호성인 축일이 바로 그 마을 축일이 됐어요. 1년에 한 번 그 축일이 되면 본당 신부가 와서 유아 세례를 주곤 했는데 그냥 물만 뿌린 거지요."
 마을들을 찾아 다니며 공동체를 만들고 마을 축일 한 달 전쯤부터는 유아 세례 대상자 부모들과 첫영성체 대상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와 첫영성체 준비를 시켰다. 위생관념이나 도덕관념이 희박한 주민들에게 건강 관리와 도덕생활을 일깨우는 것도 김씨 몫이었다.
 1992년에는 과야킬 교구가 멕시코에서 기초공동체를 도입했다. 교구는 지구 차원에서 소공동체 운동을 펴기로 하고 약 2년 정도 준비기간을 거쳐 1994년부터는 기초공동체 운동을 시작했다.
 "기초공동체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30년이 걸린다는 예상을 하고 30년 계획으로 시작했어요. 물른 지금도 계속 진행하고 있는 중이에요."
 마을들을 다니면서 보니 유아사망률이 너무 많고 출산 도중에, 또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는 산모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김씨는 1994년 의사 2명을 초청해 조산원을 시작했다.
 "오전에 함께 조산원 일을 보고 오후에는 다른 일을 하려고 했는데, 아기가 때를 가려서 태어나나요. 오히려 저녁과 밤에 더 많이 태어나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저녁 근무를 하게 했지요. "
 의사가 저녁에 근무한다는 소식에 조산소를 찾는 이들은 임산부만이 아니었다. 아픈 사람들은 다들 조산소를 찾았다. 2년이 지나면서 조산소는 진료 과목도 늘면서 24시간 근무체제로 바뀌었고, 진료 과목이 점점 늘어나면서 이제는 13~14개 과를 둔 병원이 됐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허파가 부었다고 하지만, 제가 병원을 키우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커진 거예요."
 김씨는 또 주민들의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수공예를 시작했다. 참여하는 부녀자들이 점점 늘어나 60명 정도가 됐다. 그들 자녀들 가운데 청각 장애아 2명이 있었고, 이 아이들을 위해 김씨는 인근 청각 장애아 6~7명을 더 모아 교육을 시작했다.

장애아센터 수도회에 맡겨
 "청각 장애아를 위해 작게 시작한 교육이었는데 소문이 퍼지면서 뇌성마비, 다운증후군 등 장애아들이 다 몰려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장애인센터가 됐어요."
 장애인센터는 점점 커져서 이제는 정부 인가를 받은 특수학교가 됐으며 현재 70~80명의 장애아들이 이용하고 있다.
 이렇게 지낸 세월이 어느새 30년 가까이 흘렀다. 선교사라기보다는 주민들과 부대끼며 어울려 지내는 것이 마냥 좋았던 세월이었다. 그 사이에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부쩍 커버린 병원과 장애인센터는 감당키 힘든 나이가 됐다. 이제는 손을 놓을 때가 됐다고 생각한 김씨는 사랑의 씨튼 수녀회 한국관구에 맡기기로 했다. 김씨는 지난 7월 13일 병원과 장애인센터를 모두 넘겼다. 그리고 9월 29일 휴가차 고국에 들어온 것이다.
 이제는 선교사 일을 쉴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김씨는 "국적은 한국이지만 교회로는 과야킬교구 소속이고 과야킬 교구에는 필요한 손길이 아직 많다"며 "늙어서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전까지는 과야킬교구에서 계속 살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내년 5월 말 출국할 예정이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200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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