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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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0주년 기획] 침묵의 땅 ① 전전(前戰) 시대 - 평화롭던 땅

퍼져나가던 복음 씨앗 분단으로 성장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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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평안북도 신의주성당의 장례예식 모습.
성장하던 북녘교회는 해방 후 소련의 지배를 받으면서 교세가 급격히 위축되었다.

남북관계가 맑았다 흐려지고, 형제와 이웃이 상봉했다 헤어지며 ‘6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에 일어난 민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이 올해로 꼭 60년이 됐다. 해방 후 북녘교회와 한국전쟁, 탄압받던 교회, 현대 순교자 시복시성에 대해 4주에 걸쳐 살펴본다. 한국교회사에 있어 기념해야할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필이면 ‘전쟁’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45년, 해방은 아쉬운 분단으로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에도 우리나라는 곧바로 자치국의 힘을 행사할 수 없었다. 강대국들의 합의에 의해 38도선을 기준으로 미·소 양군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고 일정 기간 동안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우리나라는 일종의 과도 국가라는 성격을 띠었으며, 소련정과 미군정 역시 38도선을 사수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들의 종교정책에 따라 천주교회 역시 혼란 속에서 고통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소련정의 북녘교회와 ‘종교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군정의 남녘교회는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됐다. 종교를 탄압받던 일제 암흑기를 지나 ‘자유’를 얻을 줄 알았지만, 분단으로 인한 또 다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북녘교회에 대한 핍박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한을 통치하게 된 소련은 교구와 수도원에 서서히 종교적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7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는 ‘연길·북한교회’의 참상이 남한교회에 알려지기도 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대희년 심포지엄’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발표한 여진천 신부(성지 베론 관리소장)는 “이 소식(북녘교회의 박해)을 들은 노기남 주교는 전국 각 교회로 공문을 보내 연길, 덕원교구를 위해 의연금을 보내주도록 요청했다”며 “박해받는 이들과 고통을 함께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구제품이 경향잡지사에 답지했다”고 말했다.

해방 후 북녘교회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암흑기에서부터 한국전쟁 당시 북녘교회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함흥교구와 덕원자치구는 1920년 경성대목구에서 분리된 ‘원산대목구’에서 1940년 다시 ‘덕원면속구’와 ‘함흥대목구’로 분리된 경우다. 가톨릭대사전은 “당시를 기준으로 덕원면속구와 함흥대목구를 합해 성직자 35명, 본당 12개, 공소 89개, 신자수 1만1004명이었으나 1944년에는 함흥교구만 본당 9개, 공소 31개, 신자수 5475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덕원면속구와 함흥대목구의 교세는 당시 빠르게 성장하는 북녘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 1949년 교구 관할 지역 내에서 활동하던 성직자와 수도자 전원이 체포되거나 해산됨으로 인해 ‘성장’을 멈춰야만 했다. 교구가 설정된 지 10여 년 만에 박해와 한국전쟁이라는 ‘슬픔’을 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1928년 설정, 1942년 폐지된 황해도 감목대리구는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할 만큼 일찍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꽃을 피운 곳이다. 따라서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서양선교사 및 한국인 신부들이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산간벽지 공소에까지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본당 설립도 활발해져 1928년 곡산본당과 삼차동본당을 시작으로 신천본당, 안악본당, 연안본당, 장련본당, 옹진본당, 송화본당, 송림본당을 설립하는 등 놀라운 성장을 거듭한다.

그러던 중 1942년 노기남 주교가 서울대목구장 겸 평양·춘천지목구장 서리로 임명되고 ‘황해도 감목대리구 제도 폐지’가 결정됐다.

이후 노기남 주교가 황해도를 관리했으나 1945년 해방 후 소련정으로 인해 교구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자 사리원본당의 박우철 신부가 교구장 대리로 황해도 천주교회를 감독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이곳의 본당 대부분은 ‘침묵의 교회’가 됐다.

북녘교회 중 가장 활발한 성장을 보였던 평양교구는 1927년 서울대목구에서 지목구로 분리돼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됐다가 1939년 대목구로 설정된 경우다. 이 지역은 일찍이 북경을 왕래하던 주요 교통로로서 사제나 평신도의 피와 땀의 발자취가 이어진 곳이다.

가톨릭대사전은 “1923년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진출하던 당시 평안도 지역의 신자 수는 5000여 명에 가까웠다”고 전한다. 평양지목구는 이와 같이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더니 1938년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은 한국 최초 방인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평양지목구는 본당 19개, 공소 134개, 신자수 1만8000여 명, 예비신자 3200명에 달할 정도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1948년 주교좌성당으로 쓰려던 ‘관후리성당 건물을 평양 인민위원회에 양도하라’는 조치를 거절하며 박해가 시작됐고, 성직자들이 체포되는 등 수난을 당했다.

이러한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북녘교회의 탄압은 한국전쟁과 함께 가열되기 시작했다.


오혜민 기자 (oh0311@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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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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