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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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0주년 기획] 침묵의 땅 ② 전쟁의 상처, 피로 물든 땅

전쟁 중에도 신자들 곁 지킨 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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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소련정과 미군정이 각각 들어서며 ‘분단 아닌 분단’의 길을 걷게 됐던 우리나라는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또 다른 시련을 맞게 된다.

미사를 봉헌하는 그 주일에 울린 총성,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교회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도를 높여갔다. 특히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중공군이 후퇴하며 북녘에 있던 우리 교회 유산들은 힘없이 모두 무너져갔다.

주일의 총성, 한국전쟁

“포성은 점점 더 가까이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후퇴하며 싸우는 인민군을 만났다. 상관들은 난폭해졌고, 호송원들도 냉혹해졌다. 그들은 우리에게 ‘빨리! 빨리! 전진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을 죽이겠소’라고 위협했다. 나는 우리 사랑하올 관구장님과 같이 있고 싶어 그분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이분은 76세나 되신 연로하신 분이에요. 50년이나 당신 나라에 있는 환자들을 간호하고 고아들을 기르고 보살피는데 헌신하신 분이오’라고 말했다.”

성심의 으제니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동토에서 하늘까지’라는 책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책은 당시 한국관구장으로 일하던 베아트릭스 수녀와 함께 공산군에게 피랍돼 ‘죽음의 행진’과 3년간 포로생활을 겪은 으제니 수녀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의 평온한 일상을 가르고 북한군이 서울로 쳐들어왔다. 삽시간에 백동(현 혜화동)은 위험한 상태였고, 한국에서 소임을 다하던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피란길에 올랐다. 하지만 한국에 머물겠다고 청한 이들은 모두 체포됐다.

공산군과 함께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며 수용소에 수감됐던 ‘죽음의 행진’이 시작됐다. 으제니 수녀와 관구장 베아트릭스 수녀도 ‘스스로 남은 이들’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나를 떼밀며 관구장님과 떼어 놓았다. 가슴이 찢기는 아픔의 순간이여! 나는 포로수용소의 책임자에게 언제 그분이 돌아오시느냐고 물어봤지만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관구장님을 다시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다니 너무 어리석군요. 그분과 헤어진 후 총소리를 듣지 못했습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듯 슬피 울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두 팔을 벌리시고 우리 관구장님을 맞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 남아있어야 하는 수녀에게는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수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늘 신자들 곁에 있으려 노력했다.
사진은 미 해군 막사에서 예수성심시녀회 창설자 남 루이 데랑드 신부와 수녀들, 성모자애원 아이들의 기념촬영(1951년)
 

교회를 수호하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에 대응하는 교회의 역할은 대부분 ‘교회 수호’로 이어졌다. 이 같은 결정이 성직자들의 희생을 늘리는데 기여했다는 지적도 이어지지만, 교회의 단호한 결의와 신자 보호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다.

실제로 서울대목구는 1950년 6월 26일 긴급 교구 참사회를 열고, 전쟁에 대응하는 방침을 결정한 후 시내 각 본당 사제들에게 전달한다.

당시 그들이 정한 방침은 ▲아직은 한강을 건너 피신할 길이 있으니 공산당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 없는 윤형중 신부와 김철규 신부는 무조건 남하하도록 한다 ▲보좌신부들과 특수사목에 종사하는 신부들은 될 수 있는 대로 피란을 떠나도록 권유한다 ▲본당 신부들은 직장을 사수하고 교우들과 생사를 함께 한다 등이었다. 따라서 명동성당의 경우 8월 6일까지도 주일 미사가 봉헌됐으며 가정방문과 성사집전을 비롯한 사제의 활동도 계속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남한지역에서도 본당을 지키라는 교구장의 지시에 성실히 따른 많은 성직자들이 수난을 당했다. 서울대목구와 춘천지목구, 대전지목구 신부들의 경우 ‘본당을 지키라’는 교구의 방침 내지 본당 신부들의 의지 때문에 희생이 비교적 컸다.

북녘교회의 고통은 남한과 견주기 어려울 정도다. 1950년 6월 24일까지 북한에 남아 사목활동을 하던 신부는 모두 11명이었는데 전쟁 발발과 함께 모두 검속에 걸려 그 이후 아무도 사목 일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전한다. 또 유엔군의 무차별 공중 폭격으로 1950년 말까지 남아있던 북녘의 교회건물이 무너졌고 중공군이 후퇴하며 ‘사실상 폐허’로 변했다.

평양교구 출신 원로사목자 김득권 신부는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자 어쩔 수 없는 폭격이 일어났고 그때 북한교회들이 모두 파괴됐다”며 “전쟁 당시 인민군들은 젊은 사목자들과 피란 가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들도 죽였다”고 말했다.


 
▲ 전쟁 전후 북한군에 체포된 성직자와 수도자·신학생
 

 
오혜민 기자 (oh0311@catimes.kr) (oh0311@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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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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