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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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0주년 특집] 한 마리 양을 지키던 목자를 기억합니다 - 이광재 신부님을 기리는 두 할머니의 사연

신부님의 숭고한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신자들 위해 몸 아끼지 않고 성당 지키다 선종, 한시도 신부님 잊은적 없어… 지금도 눈에 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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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 찾아가는 길, 죽음도 두렵지 않아

김경태(젤마나·92) 할머니가 낡은 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낸다. 칠이 벗겨지고 알이 끊긴 낡은 갈색 묵주를 만지작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

9일 강원도 속초 청호동본당에서 만난 젤마나 할머니는 그런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64년 전 이야기지….”

젤마나 할머니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고향 양양이 두 동강 나고 인민군의 총부리를 피해 38선 이남으로 넘어온 이야기, 그 이후 목숨 걸고 38선을 일곱 번이나 넘나들며 이광재 신부를 도와 교회를 지키던 이야기,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강릉에서 전교회장을 맡아 신자들을 돌보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내 하나뿐인 아들이 세살 때 죽었어. 그때 동네에 살던 어떤 이가 와서 대세를 받게 하라는 거야. 대세가 뭐냐 물으니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거라고 해. 그때 내 아들이 대세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됐지. 나도 죽은 아들을 하늘에서라도 만나고파 세례를 받게 됐어. 바로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에게서지….”


젤마나 할머니는 개신교를 다녔던 시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다시 보겠다는 일념 하에 성당을 찾았다. 인민군에게 쫓겨 38선 이남으로 남몰래 도망친 후 열흘 만에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 성당을 찾을 정도로, 젤마나 할머니의 신심은 두터웠다. 사선을 넘어 성당을 찾아오는 젤마나 할머니를 지켜준 것은 다름 아닌 이광재 신부였다.

“나물을 캐는 척 하며 38선을 넘었지. 때로는 거적때기를 쓴 나무꾼이 돼 나무를 해 오는 척 하며 성당 언덕을 올라갔어. 이광재 신부님이 나를 보고 ‘아이쿠! 젤마나가 또 38선을 넘었구나!’하고 한숨을 쉬셨지. 한번은 인민군이 내 소식을 듣고 성당에 들이닥쳤어. 신부님께서 급히 옆에 있던 커다란 박스를 덮어 나를 숨겨주셨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 신부님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를 끝까지 숨겨주신거야.”

젤마나 할머니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가며 38선을 넘나들었다. 부모가 그리웠고, 고향이 그리웠고, 무엇보다 신부님과 교우들이 있는 성당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기 전 신부님 심부름으로 신학생들과 수녀님들을 38선 이남으로 모셔오기도 했어. 지금 생각해보니 이광재 신부님은 남아있는 교우들을 돌보기 위해 월남하지 않으신거야. 정말이지 신자들을 위해 자기 몸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어. 다른 사목자들은 다 내려보내고도 자신은 결국 성당을 지키다 돌아가셨으니….”

전쟁 발발 후 강원도 강릉에 자리잡은 젤마나 할머니는 그런 신부님을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고 했다.

“맨몸으로 내려와 먹고 살 길이 막혔지. 하느님만 찾으며 열심히 선교했어. 글도 읽을 줄 모르던 내가 교리를 배우며 글을 깨치고, 200여 명의 대녀를 둘 만큼 열심이었지. 나도 내가 믿기지 않았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었지. 그렇게 강릉지역의 전교회장이 됐어. 그때 이춘선 마리아를 만났지.”

주님 부르며 걸은 피란 길, 신앙의 꽃 피어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강릉에 살고 있던 이춘선(마리아·90) 할머니는 유산을 하고 자리에 누워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전쟁을 피해 남으로 달아났지만, 마리아 할머니는 꼼짝 달싹을 못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 아이는 뱃속에서 목숨을 잃었고, 마리아 할머니도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때 마리아 할머니의 방문을 열고 “어서 일어나 목숨을 구하라!”고 외친 이, 그가 바로 젤마나 할머니였다.

“내가 아파 누워 있었지. 난리통에 다들 피란을 가고 마을이 텅 비었는데, 젤마나가 문을 열고 ‘인민군이 내려오니 정신 차리고 빨리 도망가라!’고 외치고 문을 ‘쾅’ 닫는 거야.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 내가 여기 누워있다가 죽겠구나…. 우리가족의 목숨을 살려야겠단 생각뿐이었어.”

마리아 할머니는 젤마나 할머니의 도움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피란길에 올랐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기도의 힘으로 버텼다고 했다.

“천주님과 성모님이 아니었다면 난 이미 몇 번이고 죽은 목숨이야. 끊임없이 성모송을 외우며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걸었어. 공산주의를 피해 월남할 때도, 전쟁이 나 부산으로 피란 갈 때도, 난 오로지 성모님께 매달렸어. 이 길 위에서가 아니라 성당 곁에서 죽게 해달라고, 그 한 가지 기도만 했어.”

마리아 할머니는 당시의 고통이 떠오르는 듯 눈을 질끈 감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생사를 넘나들면서도 기도만은 끊이지 않았지. 겨우 부산 중앙성당에 도착했을 때 ‘목숨만은 구했구나’하고 성당문을 열었는데, 감실 주위 공간만 동그랗게 남겨놓고 피란민이 꽉 들어찼더라고. 시멘트 바닥에 잠을 청하고, 주운 깡통에 국을 끓여 먹고, 나뭇가지를 젓가락 삼아 밥을 먹을 때에도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기도를 올렸어. 모든 것이 기적이고 은총이었어.”

오로지 기도로써 온 가족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마리아 할머니의 신심 역시 남달랐다. 연길교구가 고향인 마리아 할머니는 공산당이 닥치자 1946년 원산으로 남하했다. 원산에서 또다시 양양으로, 양양에서 강릉으로, 강릉에서 또다시 부산으로 ‘자유’를 찾아 몇 번이고 사선을 넘은 것이다.

“이유는 한 가지야. 난 하느님을 자유롭게 믿고 싶었거든. 공산주의가 어떤지 알아? ‘하느님도 없다. 영혼도 없다. 이 세상에서 권세를 누리면 된다.’ 주의야. 우리 집안이 대대로 신심깊은 구교집안이거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 47년 6월, 양양에서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 강릉에 있는 천주공교회(강릉 임당동본당 전신) 성전에 들어섰을 때 맥이 탁 풀리더라고. 그렇게 보고 싶었던 십자가를 마주하고 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어.



가톨릭신문  201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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