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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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 60주년 특집] 황인국 몬시뇰의 1ㆍ4후퇴 이야기

칼바람 속에 옷을 벗은 채 살얼음 깨며 대동강 건너... 공산 치하에서 더 이상 신앙생활 할 수 없어 월남 결심... 죽을 고비 넘기며 기도에 매달려, 고마운 이들 만나기도... 오는 11월께 일산성당에서 서울 거쳐 대전까지 피란행 걷기 계획 중... 평양교구 재건 바라며 하루 빨리 통일되기를 매일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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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ㆍ25전쟁은 참혹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ㆍ25전쟁 통계`에 따르면, 인명 피해만 군에서 77만6360명(부상 포함), 민간에서 99만968명(북측 희생자는 150만 명)이 희생됐다. 전쟁은 3년 1개월 남짓했지만, 그 상흔은 깊고 길었다. 전쟁이 벌어진 지 올해로 꼭 60돌을 맞지만, 이산가족들은 아직도 12만8111명(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 등록 기준)에 이른다.
 서울대교구 수도회 담당 및 동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평양교구장 서리 대리를 겸직 중인 황인국 몬시뇰도 똑같은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아왔다. 평양교구 관후리주교좌본당 출신 `평양 토박이`인 황 몬시뇰을 만나 1ㆍ4후퇴 당시 가족들과 함께 평양을 떠난 피란 이야기를 들었다.


 
▲ 황인국 몬시뇰이 최근에 구한 평양 사진을 보며 자신이 1ㆍ4후퇴 때 모란봉 강변에서 능라도를 거쳐 대동강을 건넌 여정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가운데 다리 건너 조그만 섬이 바로 능라도다.

   1950년 12월 5일 새벽 5시 30분. 황 몬시뇰은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부모 황대용(요한 세례자, 1916~1955)ㆍ김세준(마리아, 94)씨, 여동생 인선(바르나바, 65)씨와 함께 평양 하수구리 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넌 날이기 때문이다.

 전날(4일) 중공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대동강 철교가 끊겼고 영하 20~30도쯤 되는 혹한과 함께 칼바람이 몰아쳤다. 그러나 가야했다.

 배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강 상류에 막 물이 차오르기 전이라 새벽같이 강변으로 향한 가족은 능라도를 거쳐 강을 건널 작정으로 무작정 물속에 들어갔다. 여동생을 목말 태운 아버지가 앞장서고 그 뒤를 15살이던 황 몬시뇰과 어머니가 따랐다. 가슴 어림까지 물이 찼다. 그나마 가족들이 다 키가 큰 게 다행이었다.

 옷과 신발은 벗어 끈에 묶고 머리에 올린 채 걷는 피란민 수백 명과 함께였다. 피란민들이 지날 때마다 물길 양옆엔 살얼음이 얼었다가 깨지곤 했다. 물속에 빠지면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면, 벌거벗고 들어가지 못했을 강물이었다.

 "엄청나게 추웠지요. 덜덜 떨며 강을 건너 섬에 오르니 그대로 얼어버릴 것 같았어요. 강을 건널 때 살얼음이 깨져나가 피부를 스치며 생긴 상처가 어찌나 아팠는지 몰라요. 그런데 누군가 능라도 수도국 정수장 관사에 불을 질렀더군요. 그래서 그곳에 달려가 불을 쬐고 있는데, 아버지가 오셔서 팔과 다리에 옷을 끼워 입혀주셨어요. 겨우겨우 입었지요. 다시 반대쪽 강을 건너야 하는데, 다행히도 그쪽은 얼음이 얼어 있어 옷을 입고 쨍쨍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조심조심해서 건넜지요."

 황 몬시뇰 가족이 월남을 결심하게 된 것은 1950년 10월 18일 평양수복 직전 황 몬시뇰 아버지가 정치보위부 평양시 지부에 끌려간 게 계기였다. 교구 사제들이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가 실종되자 그의 아버지가 성당(관후리주교좌본당)에서 밤샘을 하며 사제들을 지켰던 게 이유였다. 공산 치하에선 도저히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겠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그의 아버지는 평양 외곽 사동에서 2000여 명이 학살되는 와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폐교된 평양 성모초등학교 건물에 갇혀 밤새 기도만 바치던 그를 찾은 인민군 장교가 별다른 말없이 그를 내보내 준 것이다. 황 몬시뇰 가족은 그래서 국군이 40여 일 만에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자 평양을 떠나게 됐다.


 
▲ 1950년 10월 18일 평양 수복 당시 평양교구청에서 평양교구장 서리 조지 캐롤 몬시뇰이 어렵게 회수한 사진으로, 1949년 신축 공사 중이던 관후리성당에서 당시 평양교구장 홍용호(왼쪽) 주교와 부주교(현 총대리) 김필현 신부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일제에 빼앗겨 헐린 성당 부지를 1946년 3월 29일 평양시 인민위원회로부터 회수, 재차 신축에 들어가 이듬해 9월 1일 정초식을 가졌으며, 1948년에 이미 성당 건축물 외형을 거의 다 갖췄다.
홍 주교와 김 신부는 1949년 5월 14일, 6월에 각각 북측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가 행방불명됐다.
황인국 몬시뇰의 부친인 황대용(요한 세례자, 1916~1955)씨는 김필현 신부를 지키려고 성당에서 숙직을 하다가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혀 평양수복 직전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당시 신축된 관후리성당 사진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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