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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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은 성요셉 성월 - 성인의 생애와 신심

“순명으로 구원 계획 협력한 신앙인의 모범”, 친절하고 자비로운 심성 지닌 요셉 성인, 12세기경부터 축일 정착되며 신심 확산, 성인의 모범 뿌리내리도록 늘 기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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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구원 계획에 협력한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 성인.
교회의 수호성인이며 신앙인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있다.
 

마리아의 배필이자 구세주 예수를 기르신 양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어 놓고 그 계획에 협력하셨으며 말없이 온몸으로 깊은 사랑을 보여주고 드러내신 분,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한국교회 주보 성인이신 성 요셉.

조용하고 신중하며 겸손한 그의 인상처럼 성경에서도 요셉 성인은 ‘예수의 아버지’(마태 13, 55 루카 3, 23 요한 1, 45)로 묘사되는 것 외에 마태오, 루카 복음 1~2장에서만 잠깐 언급돼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 안에 기억되고 있는 성인 역시 성경안에서처럼 침묵 속에 겸손하게 묻혀 계신 듯하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와 더불어 하느님 아버지로서 그 지고의 직무를 나누도록 선택 받은 특별한 부름을 받았다. 마리아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 계획에 절대적으로 순명하고 존중을 표했던, 하느님 뜻을 따르는 동반자 역할을 한 중요한 인물이다.

성요셉 성월을 맞아 성인의 생애부터 복음서에 드러난 모습, 신심 등 그 면면을 짚어보고 다시 한 번 그의 특별함에 눈길을 두어본다.



다윗의 가문 요셉

‘요셉(Joseph)’은 히브리어의 ‘더하다’에서 나온 것으로 ‘하느님께서 후손을 더하시기를’이란 뜻이다. 당대에는 무척이나 흔했던 이름으로 알려지는데, 구약의 요셉 이름을 따서 이름 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복음서에서도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만이 요셉에 대해 언급할 뿐이고 마르코, 요한 복음서에는 요셉과 연관된 내용이 거의 없다. 마태오, 루카 복음서에서도 요셉은 예수의 탄생기, 성장기에만 나타날 뿐이다. 그만큼 요셉의 생애나 출생에 관한 내용을 찾기는 쉽지 않다.

요셉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가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야곱’이라 제시되고 루카 복음서에서는 ‘엘리’라 밝혀져 있는데 이런 불일치에도 요셉이 ‘다윗의 가문’(마태 1, 1 루카 1, 27)이란 내용에서는 같은 의견이 드러난다.

출생지나 생애에 대한 기록도 복음서마다 다르게 진술돼 있어 진위를 가리기는 쉽지 않지만, 예수를 ‘목수의 아들’(마르 6, 3 마태 13, 55)로 지칭한 부분들은 요셉의 직업이 목수였음을 간접적으로 파악하게 한다.

또 루카 복음서를 참고할 때 요셉이 호적 등록을 위해 나자렛 고을을 떠나 다윗의 고을 베들레헴으로 올라갔음(루카 2, 4)을 알 수 있는데 이로써 베들레헴에 출생지나 연고지를 두고 오랫동안 나자렛에서 생활해 왔을 것이란 추측을 할 수 있다.

예수님 시대 유다 랍비들은 남자들에게 13~19세 사이에 결혼할 것을 가르쳤다 한다. ‘의로운 사람’ ‘법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지칭되던 요셉은 그러한 랍비들의 말을 잘 따랐을 가능성이 있고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요셉의 활동이 그려지지 않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요셉은 50세 전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낳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의 원복음서’ ‘토마스 복음서’ 등 위경에서는 요셉을 마리아와 결혼할 당시 이미 나이가 지긋한 노인으로 보았으며, 그것을 이유로 예수의 공생활 이전 숨졌을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복음서의 요셉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에 할애되고 있지만 성경 안에서 드러난 요셉은 ‘의로운 사람’ ‘자비로운 심성’ ‘경건한 성품’ ‘깊은 신심’의 소유자로 비춰지고 있다.

마태오 복음 1장 19절에서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의롭다’는 요셉의 평판은 그가 법을 어기지 않고 충실히 살아가려고 노력한 삶의 방증이라 볼 수 있다. 정혼녀가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당시로선 대단한 스캔들을 불러올 수 있는 상황에서 ‘남몰래 파혼하기로 했다’는 것은 법을 준수하면서도 마리아가 공적으로 비난받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성인의 ‘친절하고 자비로운 심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또 천사의 말을 듣고 의심을 떨쳐 버림으로써 마리아를 데려 오고 아기와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난 나선 장면에서는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경건한 성품’이 드러난다. 그의 굳은 신심은 ‘정결례’를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간 구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결례는 남자 아이를 출산한지 40일 후, 여자 아이를 출산한지 80일 후 출산한 여자만이 치르는 것이었고 맏이를 주님께 봉헌하는 것도 일정 비용만 부담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온 가족이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정결례를 마친 것은 매우 깊은 신심을 지니지 않았다면 쉽지 않았을 결정이다.

성요셉 신심의 역사

요셉 성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공경은 800~900년대 콥트교회 달력에 나타난 흔적으로 더듬어 볼 수 있다. 또 ‘성요셉 이야기’라는 외경이 4세기부터 7세기까지 대중들로부터 사랑 받았다는 점을 볼 때 성요셉 신심은 일찍부터 움을 틔운 것으로 보이나 교회안의 공식적인 신심은 비교적 늦게 나타난다.

8세기 후반 프랑스 북부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알려지는데 9~10세기경 지역 순교자 일지에 ‘주님의 양부’라는 칭호가 기록된 것을 찾아볼 수 있고 1129년 이탈리아 볼로냐의 한 성당이 처음으로 요셉 성인에게 봉헌됐다.

이후 성모 마리아 공경과 지위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토마스 아퀴나스,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 등 학자들이 이러한 신심 전파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알려진다.

이즈음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해 발발했던 십자군 전쟁은 첫 원정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십자군들은 나자렛에 요셉 성인을 공경하기 위한 교회를 건립했다고 기록되는데 성인에 대한 공경과 축제는 성지에 남아 있던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노력으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3월 19일 성요셉 축일은 12세기 경에야 정착됐다. 그러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성요셉 신심이 보다 널리 확산될 수 있었던 계기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출신 교황 식스토 4세가 로마에 축일을 도입하고 전 교회로 확대시키면서부터였다.

이어서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1621년 요셉 축일을 의무 기념일로 격상시켰고, 이때부터 성요셉 공경에 대한 바로크 양식의 그림 조각이 성행하게 됐다. 성요셉 공



가톨릭신문  2011-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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