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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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기획] (중) 북한에 숨은 신앙의 꽃 지키기 위한 한국교회 노력

갈라진 형제 향한 조건 없는 사랑 나눔 지속, 북한 유일 ‘장충성당’ 건립에 기도·노력 바쳐, 민족 화해·일치 염원 평화통일 기원 미사 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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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의 진의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역사의 진실을 보기 위해 애썼던 한국교회의 대북선교활동은 1980년대 들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85년 주교회의 산하 북한선교위원회(현 ‘민족화해위원회’의 전신)를 공식출범하는가 하면, 평양을 방문해 장충성당 건립에도 영향을 미친다. 6월 19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1980년대 이후 북한교회를 위한 한국교회의 노력과 오늘날 민족화해사목 현황에 대해 소개한다.

■ 북한선교위원회 공식 출범

대북선교의 물꼬를 튼 것은 개신교였다. 개신교 충현교회는 1972년 12월 이미 북한선교를 위한 최초의 민간운동 단체였던 ‘씨앗선교회’를 조직했고, 1977년에는 그 명칭을 ‘북한선교회’로 개칭했다. 또 1981년 11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와의 대화’를 기점으로 대북선교를 구체화했다.

1981~82년 당시 한국교회는 ‘이 땅에 빛을’이라는 대주제 아래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러 논의를 거친 끝에 ‘이 땅에 빛을’이 지칭하는 ‘이 땅’은 갈라진 땅이며, 200년 한국교회 역사에서 이 땅이 갈라졌던 때는 얼마 안 된다는 점, 그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역사였다는 데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간 대북선교활동에 무관심했으며 개신교에 비해 선교활동이 저조했다는 반성도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 준비를 시작했던 1982년 12월 10일,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산하에 ‘북한선교부’가 출범했다. 당시 북한선교부 총 책임자였던 고 김남수 주교(전 수원교구장)는 이듬해 6월 25일 ‘주께서 함께 계시다’는 제목의 북한동포에게 보내는 특별 메시지를 발표했고, 1984년에는 회보 ‘북한선교’를 격월간으로 발행하기에 이른다.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회가 해체됨에 따라, 북한선교부는 주교회의 직속기구로 개편되고, 다음 해인 1985년 10월 북한선교위원회로 이름을 바꿔 본격적인 대북선교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 북한에서 신앙생활을 지속해 오던 박덕수·홍도숙 부부가 1988년 부활대축일을 맞아 바티칸 초청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하고 있다.
같은해 10월에는 북한 유일의 ‘장충성당’이 건립됐다.

■ 장충성당 설립 뒷이야기

1985년 북한선교위원회를 발족하면서 주교회의는 명동성당에서 공식후원회 발족식을 성대하게 개최했다. 당시 북한 당국은 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튿날 1985년 8월 31일 ‘로동신문’에는 ‘종교의 탈을 쓴 반공 광대놀음’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남조선 가톨릭 교계에 최근 대북선교후원회라는 것이 조직됐으며 이는 종교를 이용하여 사상 문화적 침략을 꾀하는 미제의 상투적 수법”이라며 북한선교위원회 설립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1987년 6월, 북한은 평양에서 비동맹특별각료회의를 개최하고, 이 자리에 바티칸대표단을 초청한다. 한국교회는 이 대표단에 장익 주교(전 춘천교구장·당시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를 파견해, 대북 선교 접근에 박차를 가한다. 장익 주교는 당시 북한에 남아있던 신자 들을 찾아냈다. 김승렬(야고보·약 60세), 마등용(바오로·63), 박덕수(마르코·60), 홍도숙(데레사·55) 등 약 5명이다. 장익 주교의 보고로 존재가 드러난 이들 북한 신자 중 박덕수·홍도숙 부부는 이듬해인 1988년 부활절에 바티칸의 초청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한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북한 유일의 성당인 장충성당이 건립된다. 장충성당에서의 첫 미사는 장익 주교와 정의철 신부(서울대교구) 집전으로 봉헌됐다. 당시 남한교회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받아 선물한 성작은 아직도 장충성당에서 미사가 봉헌될 때마다 사용되고 있다.

1985년 ‘로동신문’ 보도에서와 같이 ‘종교는 반공 광대놀음’이며 ‘미제의 상투적 수법’이라고 비하했던 북한 당국이 3년 만에 바티칸을 방문하고, 공식적으로 성당을 건립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며, 남한교회의 노력과 기도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장충성당에 장미 문양이 도배돼 있고, 성당이 성모님께 봉헌됐다는 점을 감안할 때도, 특별한 성모신심을 갖고 있는 남한교회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 1980년대 들어 한국교회는 주교회의 산하 북한선교위원회를 출범하는 등 대북선교를 위해 구체적인 활동을 지속해 왔다.
사진은 1998년 북한을 방문,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당시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장 최창무 대주교(전 광주대교구장·가운데).



가톨릭신문  201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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