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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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66주년 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천주교 대표 파견됐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천주교 청년단 대표 곽연성씨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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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은 광복절 66주년이다. 일제 강점 직전인 1909년에 이뤄진 안중근(토마스, 1879~1910) 의사의 의거는 한국천주교회 독립운동사에서 정점이자 전환점을 이룬다.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한 이후에도 제2, 제3의 안중근이 계속 생겨났다. 이른바 `안악사건`의 주역 안명근(야고보), `105인 사건`의 이기당(안토니오) 등의 활약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3ㆍ1운동 당시에도 서울과 원산ㆍ신의주ㆍ평양ㆍ해주ㆍ공주ㆍ대구 등 7개 도시에서 천주교 신자만 53명이 체포 구금되는 등 독립을 향한 천주교회의 염원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3ㆍ1운동 직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천주교 대표가 파견됐다는 사실이 최근 공개됐다. 그 비화를 취재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천주교대표로 파견된 곽연성씨의 아들인 곽성현(오른쪽)씨가 한국교회사연구소 도서실에서 백병근 연구원과 함께 사료를 검토하고 있다.
[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
 

 
▲ 곽연성 독립투사와 관련된 각종 독립운동사 자료들.
[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나아갈 길을 논의하고자 1923년 1월 3일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 천주교청년단 대표로 곽연성(요셉, 1893~1934년께) 등 2명이 선정돼 활동했던 사실이 최근 확인됐다.

 4일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에 따르면, 1923년 2월 13일에 곽연성과 신원이 밝혀지지 않는 인물 등 2명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천주교청년단 대표로 선정된 것으로 밝혀졌다. 3권 분립 민주공화제를 지향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의회는 의정원으로, 국민대표회의는 임정의 분열을 막기 위해 소집된 임시기구였다.

   #독립신문 기사에서도 확인

 이는 일본 외무성 육해군성문서 제2집 「한국민족운동사자료」(중국편) 등 사료를 통해 공개됐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그해 2월 12일 국민대표회의(의장 김동삼) 9일째 회의에서 한국천주교청년단 대표로 곽연성(郭然盛)이 선정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 내용은 같은 해 3월 1일자로 발행된 독립신문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대표 자격 심사위원 보고에 의해 경상북도 지방 대표 윤자영, 천주교청년단 대표 곽연성, 대한통의부 대표 김창환ㆍ김이제 제씨(諸氏)의 대표 자격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곽연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천주교 공식 대표로 파견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교회측 문건에서 곽연성에 대한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그 증거다.

 이 문건을 검토한 백병근(미카엘) 한국교회연구소 연구원도 "이 문건은 곽연성이 천주교청년단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파견됐고, 안창호 계열 인사로 개조파에서 활동했으며, 만주에서 농민호조사를 조직해 활동한 사실이 적시돼 있을 뿐 그가 공식적으로 천주교 대표로 활동했을 가능성은 없다시피하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그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선을 결정하는 국민대표회의에서 곽연성이 천주교 대표로 선정됐다는 사실은 그가 임정에서 천주교회 목소리를 일정 부분이나마 대변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계속해서 여러 문건이 국민대표회의에서 곽연성의 활동상을 드러낸다. 임정에서 서도파(평안황해파)로 분류돼 안창호(1878~1938) 계열에서 활동한 곽연성은 안창호와 마찬가지로 `실력양성론`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곽연성은 개조파가 △임정이 전 민족적 운동인 3ㆍ1운동의 결과물이고 △국민 지지를 받고 있으며 △건국 이후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해 왔다면서 `무력투쟁노선`을 견지하던 창조파가 임정 내에 새로운 최고기관을 만든다면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개조파 입장에 동조했다. 그래서 창조파만으로 진행된 회의에서 새로운 기관을 세워 국호를 `한(韓)`이라 결정하고 새로운 헌법 제정과 함께 국민위원회를 조직한 데 대해 반대하는 개조파 성명(57인 연서)에 함께한다.

 그 내용이 `곽연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1923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려 있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인 김구(1876~1949)가 내무령 1호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하면서 국민대표회의는 폐회된다.


 이같은 내용은 곽연성의 자녀 1남 3녀 가운데 둘째인 곽성영(아녜스)씨가 남긴 기록을 통해 전해졌다. 그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치치하얼(齊齊哈爾)시에서 성당 학교 교사를 하다가 해방 뒤 공산치하에서 서원 도서 담당자로 일했다. 1992년 한ㆍ중 수교와 함께 영구 귀국, 보혈선교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충북 청원 은혜의 집에 거주하던 그는 부친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지정해줄 것을 신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0여 년 전 타계했다.

 이에 6ㆍ25전쟁 당시 월남, 의정부에서 살고 있는 아들 곽성현(요한사도, 79, 아명 곽영수)씨가 그 뜻을 잇고 있으나 자료 미비로 국가유공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만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이 주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어서 추후 곽연성에 대한 역사자료가 얼마나 발굴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1923년 이후 한국노병회 등 단체에서 활동

 그렇다면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 곽연성은 어디로 갔을까.

 1923년 6월 국민대표회의가 폐회됐음에도 곽연성은 임정이 자리잡고 있던 상하이에 머문다. 당시 그가 가입해 활동하던 단체는 한국 독립군 양성과 사기진작,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결성돼 있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이사장 김구)라는 조직으로, 그 단체에서 그해 11월 포상을 받기까지 한다. 일본 상하이총영사관은 그해 11월 3일 외무성에 보낸 문건 `한국노병회 창립 1주년 기념 축하상황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통해 그가 포상을 받은 사실을 전한다.

 그러나 이후 그



가톨릭평화신문  201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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