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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엠마오 일기 / 최영균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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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던 사순 시기가 끝나고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정점으로 부활 시기가 시작됐다.

거리두기 완화와 일상생활 정상화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신자들은 어느 때보다 활기가 있어 보였다. 사목자로서 내 마음 역시 살짝 들떠 있어서 그런지 미사 후 좀 피곤했고 기분 전환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그래서 대축일 다음 날 사목 위원들과 엠마오를 떠났다. 목적지는 군산이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미곡과 자원을 수탈해 나간 항만이자, 근대도시의 기능과 형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먼저 군산 시내 동국사를 방문했다. 동국사는 16세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일본 선교 때 대결하기도 했던 조동종파 승려 우찌다가 1909년 창건했다. 절을 나와서는 거리를 걸었다.

일제강점기 근대도시 군산의 흔적을 일정 부분 복원한 일본식 가옥과 상점이 즐비했다. 중간 중간 일본식 정원을 장식한 붉은 동백꽃과 따뜻한 봄바람이 기분을 한껏 끌어올렸다.

항만 쪽으로 가니 근대식 석조건물인 옛 세관(稅關)과 벽돌로 지은 창고가 보였다. 세관 옆에 흔적만 남은 옛 미두장(米豆場) 자리를 보니 채만식 소설 「탁류」가 떠올랐다. 주인공 초봉과 한탕 인생을 꿈꾸며 미두장 주변에 기생하는 정주사의 이야기 주 무대가 바로 미두장이었다.

미두장은 주식시장과 비슷한 현물시장이었다. 여기서 쌀 가격이 책정되면 시세차익을 얻는 투기가 집단으로 성행했다. 정보와 자본의 우위를 점한 일본인들과 달리 일확천금의 욕망과 무지로 뛰어들어 돈을 날린 조선 서민들의 눈물과 좌절이 녹아있다. 미두장 앞의 바다를 바라보니 미두 투기로 가진 돈을 탕진한 정주사가 바다에 빠져 죽으려 객기 부리던 장면이 그려졌다.

같이 간 사목위원들과 이런저런 역사적 유래에 대해 장광설을 풀다 보니 배가 고팠다. 군산 역시 인천과 목포처럼 항만이 발달했기에 일제강점기 때 항만 부두 노역을 담당하는 중국인 노무자, 즉 쿨리로 불린 사람들이 많았다. 중국 음식이 발달한 이유다. 중국 음식점을 찾아 현지 특유의 비법으로 조리한 탕수육과 짬뽕을 먹었다. ‘아! 행복하다.’ 좋은 것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성당에 돌아와 강론을 준비하는데,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대목에 시선이 머물며 군산으로 떠난 하루가 부끄러워졌다. 엠마오 길의 제자들은 스승 예수와 함께한 기억을 떠올렸다. 엠마오로 가는 길, 갈릴레아, 예루살렘 등 일상 공간에서 예수를 기억했고 그 기억은 결국 신앙공동체인 오늘의 교회를 만들었다.

공간과 장소가 기억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관심과 기억이 그 장소를 만들어 낸다. 세상 것에 대한 역사와 개인의 즐거움이 군산을 지적이고 미각적으로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엠마오는 부활하신 예수를 기억하고, 그분의 길을 따르기 위해 내 삶을 이끄는 열정의 방향을 다시 잡는 여정이다. 오늘 내가 만날 장소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기억으로 빛났으면 좋겠다.
최영균 시몬 신부
제2대리구 호계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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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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