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 하나’에 처음 글을 쓰며 일전에 있었던 예비 신자에게 받았던 질문을 공유하였습니다. “어떻게 기도하면 되나요?” 어쩌면 지금까지의 글들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먼저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요. 내가 직접 경험하였다 하더라도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 뜻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좋은 말을 한다 하더라도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그 말은 아무것도 전하지 못한 채 허공만 맴돌다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이 없다면 늘 함께하시는 주님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것을 보게 하여주고 들리는 것 너머에 있는 것을 듣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은 시간을 넘어 함께하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는 열쇠가 되어줍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삶을 성찰하는 것 안에서 당시에는 찾지 못했던 그분 발자취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주님과 함께 성찰한다는 것은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시간을 넘어 같이 계셨던 주님을 더 알아나가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많은 것이 정신을 산란하게 하고 소중한 가치를 후순위로 두게 만듭니다. 물질적 기준이 우선시 되는 세상 안에서, 중요한 것은 알지만 수치로 기준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은 처음에는 소중히 따로 떼어 놓았다가, 애석하게도 왕왕 가장 뒤로 밀려나게 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민을 하다가도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사항을 맞닥뜨리게 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활을 보여주신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지금 이 순간도 이야기 하십니다. 빈 몸으로 왔더라도 빈 몸으로 가지 않는다고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은 충분히 온전한 몸으로 부활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십자가의 성흔을 안고 부활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상처가 부끄럼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음일 수도 있지만 그 상처는 누군가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상처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역사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온몸으로 사랑한 사건은 시간 안에서 영원하다는 것을 그분께서는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는 성찰도 앞날을 희망하는 바람도 주님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가 될 때 죽음도 건드릴 수 없는 영원으로 가 닿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하는 이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밀알 하나’를 통해 스스로 물어보고 답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하면 되나요?”
누군가 다시 물어본다면 “하느님과 함께 온 맘을 다해 사랑하는 이들과 살아가는 것”이라고 답을 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함께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가톨릭신문을 통해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려주시길 부탁드려봅니다.
김영주 니코메디아의 베드로 신부
제1대리구 서천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