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소장 최영균 시몬 신부)는 지난 10월 11일부터 10회 과정으로 ‘시노달리타스와 한국천주교회’ 강좌를 열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 김정용(베드로) 신부가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사목회의와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 김정용 베드로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
늘 새로워지는 교회의 꿈
회심이란 잘못된 것에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다. 새로운 인간, 새로운 교회로 초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하루를 선물로 받는 것처럼 성찰하고 기억하며 사는 것도 선물이다. 선물은 늘 새롭고, 새롭기 때문에 신난다. 나에게 주어지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성을 발견할 때, 그것만큼 신나는 선물도 없다.
나의 사제생활 역시 선물이었다. 신학생 때부터 사제라는 선물을 받으면 ‘어떤 교회를 만들어갈까’ 생각해 왔다. 그리고 ‘나는 어떤 교회를 만들고 이루어갈 것인가’를 꿈꾸며, 사제직 안에서 주어진 모든 것들을 늘 새롭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최근 교회에서 회자하는 시노달리타스 운동을 보며 나는 설레었다. 내가 꿈꾸고 만들고 싶은 교회가 바로 거기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시노달리타스는 나에게 몇 가지 의문을 줬다.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함께함’이다. 가톨릭교회는 교회를 친교의 공동체로 정의한다. 그렇다면 “나는 함께 대화하고 함께 일하며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맛보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 것이다.
교회 일은 함께 하는 것이다. 불확실할 때 함께 한다. 교회는 관료적 구조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형제적 평등과 친교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일할 때 풍요로워진다. 시노달리타스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멋진 곡을 연주하는 것과 같다.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의 나라를 향하여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다.
시노달리타스는 별도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교회와 그리스도인 존재 자체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함께 평생 복음과 그분의 나라를 전했다. 우리가 이것에서 원천적으로 멀어졌기 때문에 시노달리타스를 생각하는 것이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아름다운 품격이다. 사람을 소중하게 하는 것이다. 이왕이면 행복한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친교 안에서 새롭게 하나되는 교회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다.’(에페 4,5)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지체들의 품위도 같고, 자녀의 은총도 같고, 완덕의 소명도 같으며, 구원도 하나, 희망도 하나이며, 사랑도 갈리지 않는다.”(「교회헌장」 32항)
이처럼 모든 신자는 참으로 평등하다. 우리가 서로 존중하고 경청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 백성의 체험이다. 세례받은 사람은 누구나 복음적 진리를 알아듣고 비복음적 행동을 배척하는 본능을 가진다. 이러한 본능이 시노달리타스를 이루어갈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복음적 통찰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모든 신자가 복음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교회를 새롭게 이해하는 통찰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새로워지고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은사는 중요하다. 우리는 고립되게 살아서는 안 된다. 함께 살아가는 재미, 아름다움 이런 것들이 교회 안에서 증언돼야 한다. 아무리 경쟁 사회라 해도 도대체 인간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짓밟고 무너뜨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물어야 한다. 증언해야 한다. 세상 안에서 그런 공동체를 증언해야 한다.
200주년 사목회의와 시노달리타스
성모 마리아는 토착화의 전형이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 말씀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 세상에 생명을 낳아주었다. 이것이 토착화의 본질이다.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의 주제는 지역 교회 현안이다. 지역교회가 바라고 필요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구 단위에서 이뤄지는 시노드는 행사 치레나 이벤트가 아니다. 한국천주교회의 전국 교구들이 이미 1984년 시노드를 개최한 바 있고, 오래된 일이지만 이 시노드는 한국교회의 미래에 영감과 통찰을 시사한 바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한국교회에 토착화한 것이 200주년 사목회의다. 안타까운 것은 그 당시 나왔던 좋은 제안의 의미가 많이 사장됐다는 것이다. 지금 보아도 좋은 게 많다. 토착화에 대한 열망·갈망들이 의안으로 나왔다. 그러나 200주년 사목회의의 한계는 의안으로 나온 것이다. 공의회처럼 문헌으로 나와야 하는데, 의안으로 나온 것은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200주년 사목회의에는 오늘날 보아도 참신한 내용이 있다. 본당 사목평의회와 교구 사목 평의회에 의견 제시뿐만 아니라 결정에 대한 표결권을 주자는 포괄적 제안도 있었다.
200주년 사목회의를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한국에서 평신도와 성직자가 함께 모인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했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방한 때 “한국교회 신앙 토착화를 위한 결정적 계기였다”고 의견을 밝혔다. 결국 200주년 사목회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토착화 노력이고 교회의 복음화(교회쇄신) 세상의 복음화(민족의 복음화)를 지향한 한국교회 최초의 시노달리타스이다.
200주년 사목회의의 가장 근본적인 목표는 하느님 나라이다. 끊임없이 회개하고 참여하고 쇄신하는 것이 교회다. 시노달리타스는 이 근본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성직주의의 극복과 거룩한 직무에 대한 새로운 이해
세계교회 차원에서는 성직주의를 어떻게 쇄신할 것인지가 공통 주제다. 각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무를 부여받는 것이다. 직무란 사제가 주거나 교구장이 주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 직무의 권위를 받는다. 어떤 직무도 사적일 수 없다. 직무는 공동체 건설과 교회쇄신, 공동선을 위한 것이다. 자기에게 이로운, 편하게 되는 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실패한다. 시노달리타스는 사유화할 수 있는 유혹으로부터 해방해줄 것이다.
진짜 권력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상대방이 하도록 하는 것이다. 본당 사목 위원도 소모적인 것이 아니라 선물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선물로 오셨다. 당연히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선물이다. 그걸 잊는다.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제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 전체의 직무는 해방시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노달리타스가 아니라고 말한다. 교회가 제도적 민주주의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공동 식별의 과정 유무에 있다. 공동 식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이 이뤄질 때 교회는 일그러진다.
집안에서나 공동체에서나 함께 해야 한다. 모이고, 회의해야 한다. 그게 공동 식별이다. 다 모여서 결정하고 기도해야 한다. 이 사안은 모두에게 관계되는데, 일부만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사람이다. 우리는 교회다! 아무런 결정권을 갖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한다. 그러면 시노달리타스가 된다. 그런 마음을 갖기 어렵다면, ‘결정을 위임해줘라’.
성직자·수도자·평신도 모두 시노달리타스의 주체들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이다.
정리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