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신부로 있을 때,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가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신부님은 꿈이 뭐예요?”
막 사제가 되고 난 직후에 물었던 질문이라 가슴이 턱하고 막혔다. 나는 속으로 물었다. ‘난 꿈이 뭐지?’
사제라는 단어 앞에 이를 꾸며주는 수식어가 필요해 보였다. 걸으면서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르고 나는 ‘사랑’이란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말했다. “사랑이 많은 신부가 되고 싶어!”
그러자 그 아이가 내게 말했다. “참, 신부님다운 말씀이시네요.”
그날 저녁 그 아이의 질문이 나의 지난 시절을 돌아보게 했다. 나는 어떤 사제가 되고 싶었던 걸까?
신학교 1학년 때 신부님들이나 선배들이 꼭 이런 질문을 했다.
“너는 어떤 사제가 되고 싶어?”
그러한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신학생은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저는 기도하는 사제가 되고 싶어요. 저는 가난한 이들을 먼저 생각하는 사제가 되고 싶어요.”
나도 그런 질문을 받으면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내린 결론이 아니라, 어쩌면 남들이 내놓은 답을 마치 기계적으로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였을까? 대학원생이 되었을 때 그 질문이 내게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나는 왜 사제가 되려고 하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대학원 1학년 영성 심화의 해를 보내면서 나름대로 찾았던 것 같다. 성체조배를 하면서 십자가에 달려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참 아팠다. 그때 성체조배 중에 어떤 사제가 되고 싶은지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이후에 성소에 대한 고민이 사라졌던 것 같다.
병원 사목을 맡고 있는 지금, 그때의 질문들을 나는 현실 안에서 잘 녹여내고 있을까? 나는 내 현실 안에서 ‘사랑을 담고’ 있을까? 오늘 병원 미사를 봉헌하며 사랑을 담았나? 내 강론 준비에는 사랑이 있었을까? 나는 신자들의 요구에 사랑으로 반응하고 있는가?
며칠 전, 한 선배 신부님은 내게 단 한 명의 신자를 만날 때도 기도하고 만나라고 말씀해 주셨다. 허둥지둥 병자성사를 드리고, 환자 영성체를 가는 순간들이 있다. 그 선배 신부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환자들을 만나러 갈 때 기도하려고 한다. 물론 허겁지겁 갈 때도 있다. 그래도 미사를 봉헌하면서 환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제가 되기를 기도한다.
가난한 사람들, 환자들, 상처로 얼룩진 사람들을 만날 때 ‘당신이 참 소중해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게 내 사제직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내 서품 성구이기도 하다. 그분의 사랑을 담아 말해주고 싶다.
“네가 나의 눈에 값지고 소중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이사 43,4)
이용수 십자가의 요한 신부
병원사목위원회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