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곳곳에는 한국교회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교구에 남아 있는 한국교회사의 현장들을 찾아보며 신앙의 전래에서 신앙공동체의 형성, 박해, 신앙선조들의 삶과 신앙에 이르는 한국교회사를 따라가 보면 어떨까. 가톨릭신문 수원교구는 ‘교구에서 만나는 한국교회사’를 격주로 연재하며 교구의 성지·사적지 등을 통해 한국교회사를 들여다본다.
조선에 몰아친 서학 열풍
시작이 반이요,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 했다. 역사 안에서도 첫걸음에 담긴 의미는 자못 크다. 한국교회사, 그 첫걸음의 자리가 교구 안에 있다. 바로 ‘한국천주교회 발상지이자 뿌리’라 일컬어지는 천진암성지다.
성지는 초기 신앙선조들이 모여 강학회를 열고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을 기리는 곳이다. 성지는 강학회의 주역들인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권철신(암브로시오)·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승훈(베드로),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을 현양하고 있다.
사실 강학회는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모임은 아니었다. 조선의 학자들은 ‘강학회’를 열어 책을 읽고 토론하며 학문을 탐구하곤 했다. 그러나 천주교를 학문으로 탐구하던 신앙선조들은 학문을 넘어 신앙의 길을 걸었다. 신앙과의 첫 만남을 열어준 것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덕분이다.
한역서학서는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명나라 말 무렵부터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한문으로 천주교 교리와 서양 문명에 관한 지식을 담아 저술한 서적들이다. 근대과학 등 유럽의 실용적인 문명과 천주교 교리를 담은 한역서학서는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조선에는 17세기 초부터 한역서학서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1603년 인목왕후의 책봉을 허락하는 고명(誥命)을 받으러 간 이광정이나 1631년 명에 파견된 정두원, 1633년 귀국한 소현세자 등이 한역서학서를 조선에 가져왔고, 이후로도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이 꾸준히 한역서학서를 들여왔다. 한역서학서를 통해 천문서, 과학기술서, 지리서 등 다양한 학문이 전래됐고, 「천주실의」, 「칠극」, 「영언여작」, 「성경직해」, 「수진일과」, 「성년광익」 등 수십 종에 달하는 다양한 천주교 신학·철학·윤리학서, 신심서적 등도 조선 사회에 유입됐다.
한역서학서를 통해 소개된 ‘서학’이 조선 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물론 모든 유학자들이 서학을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서학을 전면적으로 배격해야한다는 입장에서부터 실용적인 부분은 취할 만하지만 성리학과 견해가 다른 종교와 윤리는 반대하는 입장도 있었다. 수용에 대한 입장 차이는 있었지만, 서학 자체는 조선 지식인 사이에서 큰 관심사였다. 심지어 사도세자도 「성경직해」와 「칠극」을 읽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조선 사회 전반에 서학 열풍이 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정복은 「천학고」에서 “이름난 정승과 학식이 뛰어난 유학자로 이(한역서학서)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마치 제자백가의 저서나 도교·불교의 서적과 같이 서재에 갖춰두고 가까이했다”고 당시 서학의 유행을 기록하고 있다.
강학회에서 어떤 서학서를 읽었을까
성지를 오르니 강학회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강학회의 모습을 표현한 모자이크화가 세워져있었다. 강학회에 참여한 신앙선조들이 서학서로 보이는 책을 펼쳐놓고 토론하고 있는 듯한 장면이다. 강학회에서 신앙선조들은 어떤 서학서를 읽고 있었을까. 샤를르 달레 신부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를 보면 강학에서 읽은 서학서가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달레 신부는 10여 일에 걸쳐 이뤄진 강학회의 모습을 “그동안 하늘·세상·인성(人性)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했다”고 묘사하면서 “성현들의 윤리서들을 연구하고, 끝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지은 철학·수학·종교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고, 그 깊은 뜻을 해득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주의를 집중시켰다”고 밝히고 있다.
강학회는 당대 뛰어난 유학자들이 집대성한 유교의 모든 사상과 철학, 윤리학을 검토하고, 이 10여 일 간의 연구의 종착점을 서학서로 삼은 것이었다. 달레 신부는 이 서학서가 어떤 것이었는지도 언급하고 있다.
달레 신부는 “서적 가운데에는 종교의 초보적 개론도 몇 가지 들어있었다”면서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칠죄종을 그와 반대되는 덕행으로 극복함으로써 행실을 닦는 방법 따위를 다룬 책들이었다”고 전한다.
당대 조선에서 널리 읽혔던 서학서를 염두에 뒀을 때 이 책들은 「천주실의」, 「영언여작」, 「칠극」인 것으로 보인다. 마테오 리치 신부가 저술한 「천주실의」는 ‘하느님에 대한 진실된 토론’(De Deo Verax Disputatio)이라는 라틴어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를 다룬 호교론적인 교리서다. 「영언여작」은 삼비아시 신부가 구술한 것을 중국인 학자 서광계가 받아쓴 책으로, 중세 스콜라 철학의 영혼론을 소개하는 책이다. 판토하 신부가 쓴 「칠극」은 칠죄종을 덕행으로 극복하도록 이끄는 그리스도교 수양서다.
이런 한역서학서들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신앙선조들은 하느님을,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영혼을 지닌 인간 존재를, 그리고 그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을 깨달았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 한국교회의 시작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 그러나 적어도 선교사 없이 신앙을 받아들인 한국교회의 첫걸음에는 서학과의 만남이 있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