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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3)양근성지- 첫 시련, 그리고 첫 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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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물안개공원길 37. 남한강변에 자리한 양근성지는 많은 여행객들로 붐비는 양평 지역에서 하느님 안에 고요하게 머물기 좋은 성지다. 성지를 찾아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피정하는 기분이 든다. 한국교회 최초의 피정을 기억하는 공간이 바로 이곳 양근성지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첫 시련, 을사추조 적발사건

성지 우측 십자가의 길을 향하니 십자가의 길 사이에 하느님의 종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교회 첫 피정을 열었던 초기 한국교회의 지도자다. 권일신이 첫 피정을 하게 된 계기는 한국교회의 첫 시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첫 시련이란 을사추조 적발사건이다.

을사추조 적발사건은 을사년인 1785년 3월 신자들의 집회를 추조(秋曹)에서 적발한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추조는 조선시대 형조의 별칭이다.

초기에 서울 수표교 인근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의 집에서 신앙 모임을 하던 신앙 선조들은 신자들이 점차 많아지자 명례방에 자리한 하느님의 종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신앙 모임을 이어나갔다. 이 모임에는 첫 세례자인 하느님의 종 이승훈(베드로), 권일신과 그 아들 복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그 형제들을 비롯한 수십 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기경이 천주교 반대의 입장에서 천주교 박해 기록을 모은 「벽위편」에 따르면 “형조의 금리가 그 모임이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는 것인가 의심해 들어가 봤더니 거동이 해괴하고 이상해서 체포했다”며 “예수의 화상과 서적들 그리고 몇 가지 물건들은 압수했고, 형조판서 김화진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로서 잘못 들어간 것을 애석하게 여겨서 타일러보내고 다만 김범우만 가뒀다”고 한다.

신자들이 잡혀가고 성화와 천주교 서적들이 압수됐지만, 사실 을사추조 적발사건은 ‘박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이 사건은 천주교를 반대하기 위한 의도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박해의 문을 여는 시작점이었고, 첫 시련이었다.

양반이었던 대부분의 신앙 선조들은 큰 화는 모면했지만, 신분상 ‘중인’(中人)이었던 김범우는 배교 강요를 거부하다 유배지에서 사망했고, 이벽은 문중에게 감금당한 채 죽음에 이렀다. 대부분의 신앙 선조들도 가족에게 배교를 강요받고 있었다.
신앙 선조 개개인에게도 큰 시련이었지만, 이제 막 뿌리를 내리던 한국교회에도 시련이었다. 이 사건은 조선 정부와 유학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이에 이전부터 서학을 비판하던 유학자들은 천주교를 성리학의 가르침에서 이탈한 사악한 것으로 보고 배척하는 척사론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기호남인 계열에서는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교회 활동에 참여한 인사들이 천주교를 멀리하도록 개입했다.



첫 피정

을사추조 적발사건으로 신앙 활동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던 김범우도, 교리지식을 가장 탁월하게 전했던 이벽도 세상을 떠났다. 또 당시 한국교회를 이끌던 여러 신앙 선조들도 회유와 억압을 받았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교회를 멀리해야 했다. 신앙공동체의 모임, 명례방 집회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다 교회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벽, 이승훈 등과 함께 초기부터 신앙 활동과 전교에 힘쓰며 교회 창립에 기여한 권일신이 그랬다. 권일신은 다른 교회 지도자들이 활동하지 못하고, 명례방 집회가 중단된 이 위기의 시간에 교회 지도자 역할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련의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권일신이 선택한 길은 다름 아닌 피정이었다.

성지에서 남한강 반대편을 바라보면 보이는 높이 솟아있는 산, 용문산이 바로 권일신이 피정 장소로 삼은 곳이다. 권일신은 피정을 할 결심을 하고 조동섬(유스티노)과 함께 용문산의 적막한 절에서 피정을 했다.

피정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 묵상, 성찰 등을 하기 위해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한 곳을 찾는 일을 말한다. 샤를르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의 기록을 살피면 권일신이 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레 신부는 “절에 도착한 그들(권일신과 조동섬)은 피정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며 “그들은 주님과 성인들을 본받고자 하는 바람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신심 수업, 즉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면서 8일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저 기도와 묵상만이 목적이라면 권일신이 굳이 산속 절을 찾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권일신은 이미 양근 지역에서도 기도와 묵상, 선교 등을 이어왔고, 신앙 모임을 했던 명례방 역시 서울 한복판이었다. 권일신의 피정은 개인의 신심이 아닌,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 위한 영적 충전의 시간이었다.

달레 신부는 “그(권일신)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고자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성화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 알았다”며 “진정한 천주교 정신에 잘 맞는 이러한 실천은 그들 자신과 그들이 피정 후에 가르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얻게 했음이 확실하다”고 평가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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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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