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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8) 양섬과 여주 - 신유박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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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6월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조선 사회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남인 시파를 조정에서 축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신해박해 때 순교한 복자 윤지충(바오로)이 남인이었고, 여러 남인들이 서학, 천주교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유박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1800년 양섬에 울려 퍼진 부활찬미가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한 이래 신자들은 더욱 열성적으로 복음을 믿고 따르고, 또 전파했다. 비록 1795년 을묘박해로 복자 윤유일(바오로)·최인길(마티아)·지황(사바) 등이 순교하기는 했지만, 그 순교 덕분에 주문모 신부는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고, 주문모 신부가 활동한 지 5년 만에 조선교회 신자 수는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신자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져 곳곳에서 신앙 모임이 열렸다. 여주 양섬도 그런 신앙 모임이 있었던 곳 중 하나다. 양섬에 자리한 순교자 기념비가 그 모임을 기억하게 해주고 있었다.

여주 출신으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난 정종호는 1800년 3월 주님 부활 대축일의 기쁨을 나누고자 복자 최창주(마르첼리노)·이중배(마르티노)·원경도(요한)·조용삼(베드로)과 임희영 등의 신자들을 초대했다. 양섬에 모인 이들은 큰소리로 기도하고 부활 찬미가를 불렀다. 그러나 외교인이 이 모임을 밀고해 참여한 신자들은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양섬만이 아니었다. 1800년 즈음에는 신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명도회를 중심으로 상당히 활발하게 전교가 일어나고 있었고, 서울에서는 부녀자들이 새벽과 저녁으로 등을 밝히고 거리를 왕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등불 행렬을 목격한 이들은 이전에는 보지 못한 이런 모습이 이상하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그저 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해에 사람들은 이 등불 행렬이 천주교 신자들의 행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등불 행렬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신유박해가 시작되다

신유박해가 시작되기 전에도 이미 신자들이 체포되고 있었다. 여주에서의 체포가 그랬고, 1800년 12월 복자 최필공(토마스)이 체포된 것이 그랬다. 같은 달 서울 복자 최필제(베드로)의 약방에 모여 기도하던 신자들이 체포됐고, 여주와 충주 등에서도 신자들이 잡혔다.

그리고 1801년 1월 10일 대왕대비 김씨가 공식적으로 천주교 박해령을 내리면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됐다. 김씨는 “사학(천주교)이 서울에서부터 경기도와 황해도 남부, 충청남도 북부까지 불같이 일어나고 있다”면서 “엄한 금령을 어기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역적을 처벌하는 법률을 적용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다섯 가구 단위로 서로 감시하도록 조직된 오가작통법을 철저하게 시행해 신자들을 찾아내 처벌하라는 강력한 박해를 시행했다.

박해가 시작되자 조정의 신하들은 신자들을 지목해 반역죄로 다스릴 것을 연이어 상소했다. 이미 천주교 신자로 알려졌던 교회 지도층 신자들은 2월 중에 대거 잡혀 들어갔고,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을 비롯해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때 순교하거나 유배를 당했다.

이렇게 교회 지도층이 무너졌지만, 조정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고 숨어있는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독려했다. 그 결과 지방의 교회 지도층들도 대거 붙잡혔다. 붙잡힌 신자들은 서울로 압송됐고, 사형 집행을 결정하는 결안(結案, 사형할 죄로 결정한 문서)이 확정된 뒤 각자 태어난 지방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신유박해의 순교자들

양섬에서 잡힌 순교자들도 다시 여주로 돌아왔다. 순교자들은 지금의 여주성당 인근 비각거리에서 순교했다. 그 순교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순교 치명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박해의 한가운데에서도 여주의 순교자들은 의연하게 신앙생활을 해나갔다고 전해진다. 의술을 익혔던 복자 이중배는 옥중에서도 많은 환자를 치료했고, 양섬에서 부활 잔치를 주최했던 정종호는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고 신앙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았다. 이 신자들을 만난 포졸마저도 신자들의 모습에 감화돼 신자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신자들의 열심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서슬 퍼런 박해가 1년 동안 가혹하게 이어졌다. 이때 순교한 신자의 수를 정확하게 확인할 길은 없다. 황사영(알렉시오)이 쓴 「백서」에 따르면 “정식으로 처형된 자와 옥중에서 죽은 사람이 300여 명인데, 지방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고, 샤를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순교자의 수가 적어도 200명은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성이나 이름을 파악할 수 있는 순교자는 110여 명가량 된다. 이 순교자들을 살피면 여자 신자보다는 남자 신자가, 지방보다는 서울 지역 출신 신자가, 신분상으로는 양반 신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교회를 이끌던 지도층에 해당하는 신자들이 많이 잡혔고, 순교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신유박해 이후 조선 신자들이 베이징교구에 보낸 서한에 따르면 박해 직전 1만 명 정도였던 신자가 박해 이후 수천 명으로 줄어들어 서울과 지방에 흩어졌다고 한다. 순교와 유배, 배교 등으로 적어도 1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희생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신유박해의 참상은 신자가 아닌 이들조차도 “조선이 건국된 이래 올해처럼 사람을 죽인 수가 많은 적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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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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