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로 교회가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지만, 신자들은 다시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일어섰다. 무엇보다도 신자들의 성사생활을 이끌어줄 성직자가 절실했다. 신유박해라는 큰 환난을 딛고 한국교회는 어떻게 다시 성직자 영입을 추진해 나갔을까.
■ 다시 시작된 성직자 영입운동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해오름길 25 양평성당. 남한강의 유려한 풍광을 따라가다 성당에 들어서니 마당에 한옥을 입은 인물의 동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성 정하상(바오로)의 동상이다.
본당의 주보성인이니 성당에 동상이 있는 것도 그럼직하지만, 사실 이 양평지역은 정하상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일단 정하상이 태어난 곳이 양근 지역이다. 정하상의 아버지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제사를 강요하는 친척들을 떠나 가족과 함께 양근의 분원으로 이사했다. 또 양근은 정하상에게 교리를 가르쳐준 조동섬(유스티노)이 살던 곳이자 피정하던 곳이기도 하다. 양근군과 지평군이 합병된 것이 지금의 양평군이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정하상의 나이는 6살에 불과했다. 그래서 어머니 성 유 체칠리아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석방됐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살던 집마저 잃어 천주교에 적대적인 친척들 사이에서 핍박을 받으며 살아갔지만, 정하상은 신앙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이 교리를 배우고자 함경도 무산에 유배된 조동섬을 찾아가 교리를 배웠고, 조선교회를 재건할 방도를 모색했다. 바로 성직자영입운동이다.
정하상의 성직자 영입운동 전에도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시도는 있었다. 1811년 이여진(요한)과 복자 신태보(베드로)가 중국을 통해 교황청에 서한을 보낸 일이었다. 이들은 신유박해로 고통받는 신자들의 사정을 전하고 성직자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나폴레옹 군대가 교황청을 점거하는 등 어려운 상황을 겪던 비오 7세 교황은 조선교회를 돕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비록 성직자 파견 청원에는 실패했지만, 이들의 노력으로 중국교회와 연결이 회복됐고, 다시 성직자 파견 청원을 시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정하상은 21세 때인 1816년 말 동지사 일행을 따라서 중국교회와 접촉을 시도하는 한편, 성직자 영입운동에 필요한 비용을 모으기 시작했다. 정하상은 첫 여정을 통해 용기를 얻었고, 중국을 향하는 사신 행차가 있을 때마다 동행해 중국을 방문,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기록에 남아있는 자료만으로도 정하상은 1816년부터 1835년까지 무려 16차례나 중국을 방문한 것으로 나타난다. 거의 해마다 그 먼 거리를 걸어 중국을 오간 셈이다. 이런 정하상의 열정적인 활동에 1823년 역관인 성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1826년 마부 출신의 성 조신철(가롤로)이 합류하면서 성직자 영입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 조선대목구가 설정되다
정하상은 그저 당장의 성사생활을 위해 성직자를 보내달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선교사들을 파견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하상과 신자들은 서한을 통해 “당장 굶어 죽게 생긴 사람에게 한 달 뒤에 올 식량은 의미가 없고, 또 당장 식량이 있더라도 다음 달에 먹을 것이 없다면 굶어 죽을 것”이라는 비유로 호소했다. 조선교회에 지금 당장 성직자가 필요하다는 점과 앞으로도 계속 조선의 신자들을 돌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동안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조선교회를 도와오던 베이징교구는 이런 조선교회의 요청에 함께 고민했다. 조선교회의 서한을 라틴어로 번역한 움피에레스 신부는 교황청으로 서한을 보내면서 “조선에 필요한 것은 그 나라를 위해 전심할 수 있는 어떤 수도회일 것”이라고 의견을 첨부했다.
조선교회의 서한은 1827년 교황청에 도착했다. 당시 포교성성(현 복음화부)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은 움피에레스 신부의 의견에 적극 공감하면서 유럽 선교회 중에서 조선 선교를 단독으로 감당할 곳을 찾았다. 처음에는 예수회와 접촉했지만, 1773년 해산 명령을 받았다가 1814년에 가서야 다시 활동을 시작한 예수회는 조선에까지 선교사를 파견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카펠라리 추기경이 눈을 돌려 요청한 곳이 파리 외방 전교회다.
그러나 카펠라리 추기경의 거듭된 요청에도 파리 외방 전교회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선교의 위험성이나 비용문제도 있었지만, 이미 여러 선교지에서 박해 때문에 애써 건설한 교회들이 무너질 위험이 있었다. 무엇보다 파리 신학교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이 조선교회 선교에 부정적이었다.
그때 나선 것이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였다. 당시 태국 시암대목구에서 선교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9년 5월 19일 각지의 회원들에게 서한을 보내 파리 신학교 본부가 포교성성에 보낸 변명에 조목조목 반박하며 “자신이라도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겠다”고 밝히고, 교황청에도 선교를 자원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런 상황 중에 갑작스런 변화가 생겼다. 1830년 비오 8세 교황이 선종하면서 새 교황이 선출된 것이다. 새로 선출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직전까지 포교성성 장관을 지낸 카펠라리 추기경이었다. 조선 신자들의 서한을 받고, 조선교회 선교를 위해 파리 외방 전교회와 직접 교섭했으며, 조선 선교를 자원하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편지를 받았던 그가 교황이 된 것이었다. 교황은 조선교회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길 원했고, 포교성성은 이에 관한 회의를 빠르게 진행했다.
마침내 1831년 교황은 조선대목구 설정과 조선대목구장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는 소칙서를 반포했다. 정하상을 비롯한 조선교회 신자들이 띄운 편지가 조선교회의 새로운 역사로 이어진 것이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