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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13) 요당리성지: 조선대목구 세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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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대목구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했다. 대목구는 설정됐지만, 조선 정부의 박해 속에서 조선교회가 대목구의 모습으로 갖춰지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선대목구가 세워지던 당시, 조선대목구를 세우기 위해 어떤 노력들이 있었을까.

■ 브뤼기에르 주교에서 앵베르 주교로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길 155 요당리성지. 성지 순교자묘역에는 이곳 양감 교우촌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이들의 무덤이 조성돼있다. 이들 순교자 중에 외국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의 이름이다.

이 무덤에 앵베르 주교의 유해가 묻혀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해박해 당시 이곳에 머물며 사목하다 신자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박해자들 앞에 나아갔던 앵베르 주교를 기억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묘지가 조성됐다.

앵베르 주교는 조선대목구의 제2대 대목구장이자, 1837년 조선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주교다. 그 말은 초대 조선대목구장인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지 못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대목구장에 취임하면서 조선대목구 설립을 위한 모든 준비가 된 듯 보였지만, 그 이후 상황은 생각처럼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목구장 임명 소식을 듣고 1832년 8월 페낭에서 출항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싱가포르, 필리핀 마닐라, 당시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를 거쳐 중국 푸젠성 푸안현으로 중국에 입국하고, 난징에서 베이징 인근까지 대륙을 종단하면서,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 서양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쉴 곳도 찾지 못하고 이동해 탈진하여 병을 얻고 말았다. 게다가 당시 난징교구장이자 베이징교구장 서리였던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난항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브뤼기에르 주교를 낙담하게 만든 것은 조선 신자들이 보낸 편지였다. 조선의 사정이 좋지 않아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또 이미 조선에 입국한 유방제(파치피코) 신부도 편지에서 유럽인 선교사는 조선에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가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전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기하지 않고 조선 신자들과 거듭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선 입국을 추진했다. 마침내 조선 신자들과 교섭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길을 떠났다. 변문에서 조선신자들과 접선해 조선에 입국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신자들을 만나러 가는 중 마자쯔 교우촌에서 선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4년 자신의 죽음을 대비해 포교성성과 파리 신학교 등지에 조선대목구 후임자로 앵베르 주교를 추천했다. 그는 자신이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죽으면 조선대목구 설정이라는 사건 자체가 무효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조선대목구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후임 대목구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덕분에 1836년 5월 앵베르 주교가 조선대목구 부주교로 임명됐고 1837년 12월에는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닦아 놓은 길이 빛을 본 것이었다.


■ 조선대목구의 기반을 닦다

앵베르 주교는 입국 후 3개월 만에 우리말로 고해성사를 할 수 있을 만큼 언어를 익히고, 성사 집전은 물론이고 조선대목구로서의 기반을 탄탄히 닦아나갔다.

무엇보다 앵베르 주교는 조선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무를 수행했다. 조선 지방 곳곳의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집전했고, 죽을 위험에 처한 외교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운동도 전개했다. 덕분에 1년 남짓한 기간 만에 신자 수가 수천 명 늘어 9000명을 넘어서게 됐다.

뿐만 아니라 앵베르 주교는 1838년경 교회의 다양한 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 「천주성교공과」, 「천주성교십이단」 등의 기도서를 편찬했다. 이렇게 보급된 한글기도서는 더 많은 신자들이 쉽게 기도를 익히고 바칠 수 있도록 도왔다. 특히 「천주성교공과」는 1972년 가톨릭기도서가 나올 때까지 한국교회의 공식 기도서로 사용될 정도로, 조선교회의 기도생활에 크게 기여했다.

성사와 기도만이 아니었다. 앵베르 주교는 조선대목구가 운영되기 위해 재정적인 뒷받침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의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에서 보내오는 후원금이 가장 큰 재정이었지만, 조선 자체적으로도 교회 운영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했다. 이에 앵베르 주교는 회장이었던 성 민극가(스테파노)에게 교회 전답을 맡기고 경작·관리하도록 지시했는데, 그 전답이 바로 이곳 양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요당리성지 인근에는 지금도 여전히 넓은 논밭이 펼쳐져 있다.

무엇보다 앵베르 주교가 제시한 연락망은 조선교회가 긴 박해시기에도 꾸준히 보편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게 해줬다.

그동안 조선교회가 보편교회와 소통해온 방법은 신자들이 중국을 향하는 사신단에 잠입해 중국교회의 선교사와 접촉하는 방법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해외교회에서 오는 지원을 받거나 선교사를 받아들이기에는 위험성이 큰 방법이었다. 실제로 황사영(알렉시오)이 명주천에 써 중국으로 보내던 백서가 발각돼 압수되기도 했다.

이에 앵베르 주교는 안정적인 연락망을 구축하기 위해 조선 국경에서 멀지 않고 배가 자주 드나드는 항구에 집을 구해 조선교회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다. 또 이 연락망을 이용해 바닷길로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앵베르 주교의 구상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를 통해 실현됐고, 이후 여러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는 중요한 방법이 됐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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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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